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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경 May 01. 2019

나의 소중한 게으름에게 【에세이】

그가 쌓아두고 간 것들을 비워내는 작업

Intro> 그는 ‘오면 온다, 가면 간다.’라는 말도 없이 요 며칠 내 곁에 머물렀다. 비가 올 듯 오지 않는 허여멀건한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햇빛은 도통 구름을 뚫고 나오지 못하는 날씨 –하늘을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크고 높은 뚫어뻥이 있다면 시도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는 그가 나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행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가 이 글을 본다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가 마냥 싫지만은 않으므로 그가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일단 그가 내게 오면 나는 ‘비생산적’이어진다. 현대사회에서 ‘비생산적인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증상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두뇌회전은 느려지고 어떤 생각이든 한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라디오를 켜놓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것을 하지 못한다. 그가 오기 전에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영상들에 대한 의존도도 급격히 높아진다. 그러니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일단 생각을 해야 그것을 글로 쓰는데, 생각한 것이 없으니 개소리를 타이핑하는 수밖에 없다. 타자기로 두드리면서도 이 글들이 결국에는 휴지통으로 가고 말 것이라고 직감할 정도다. 그렇게 ‘비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는 밤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산더미 같은 일을 모두 미루고 자야한다고 부추긴다.      


그는 사전에 등재될 만큼 유명하다. 사전에서는 그를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말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일상생활에서 ‘태클’을 걸어주는, ‘방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가 싫지 않다. 비가 오다가 날씨가 개면 우산을 꼭 놓고 오는 것처럼 인생에서 마냥 좋거나 마냥 안 풀리는 일은 없다. 그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록 그가 오기 전의 내 일상을 망가뜨려놨지만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은 꽤 있었다. 생각이 답답하게 고여 있을 때 그는 메모를 했다. 한 두 글자인 것도 있고 문장이 꽤 여러 개인 것도 있었다. 메모한 후에 결코 그것들을 다시 열어보거나 더 깊이 생각해보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그 메모들은 제법 싸여 그가 남긴 꽤 소중한 것들이 되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글 외에도, 다큐를 찍어보고 싶고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악기를 하나쯤 다뤄보려고 젬베를 사기도 했다. 써보고 싶은 글의 종류도 아주 많다. 그런데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꽤 많이 익숙해지면서 한때 과하다싶었던 의욕들이 무의미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머물다가는 갈 존재인데 어떻게 (나름) 오랫동안 쌓아온 내 의지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 –그를 보내면서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를 쫓아내거나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곧 나고 내가 곧 그였으니까. 그가 쌓아두고 간 것을 비워내고 먼지를 털어내는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래야 다음에 또 그가 여기 머물 수 있고, 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4. 30 / 곁눈질

눈은 정면을 향해 달려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좌우를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곁눈(얼굴은 돌리지 않고 눈알만 옆으로 굴려서 보는 눈)이 있다. 사람이 곁눈질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곁눈질 하는 것은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4. 26 / 이어폰

이어폰으로 아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미 수없이 들은 음악을 주변소음까지 차단한 채 또다시 신중히 듣고 있는 건 무슨 이유람? 내가 예상했던 리듬과 가사들이 이어폰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근데 이상한 건 음악을 듣지 않고 처음부터 부르려고 하면 한 음절도 못 부른다는 거지. 이어폰으로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있으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이어폰이 귀에서 조금은 떨어져있었으면 좋겠다.      


4. 22 / Instant Karma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John Lennon의 <Instant Karma>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다. ‘Karma’는 우리말로 ‘업보’라고 번역된다. 이 순간의 업보, 라는 말이 좀 무섭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좀 잔인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오래전 John Lennon의 말대로  -“Well we all shine on / Like the moon and the stars and the sun” -매 순간 빛나는 업보를 쌓으면서 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4. 20 / 전화를 걸다

이제 전화를 ‘어디에’ 걸어야 하나. 전화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전화를 걸어둘 벽은 없어진지 오래다. ‘전화를 걸다’라는 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4. 9 / 목적지가 없다면

목적지가 없다면 비가 올 때 걷거나 뛰어도 어차피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목적지가 없다면 천천히 간다거나 빨리 간다는 개념도 없다. 인생의 목적지가 죽음이라하더라도, 우리는 목적지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시간에서 ‘빨리’, ‘천천히’라는 개념도 없다. 각자가 얼마나 맞았는지도 모르게 비를 맞으면서 걷고 있는 것이다.     


4. 7(2) / 물가

계~속 물가가 오른다면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갑자기 어렸을 때 만화에서 봤던 그림이 생각났다. 인플레이션을 ‘돈을 한보따리에 가득 담아야지만 과자를 살 수 있는 것’으로 설명했던 그림... 안 그래도 언론매체에서 화폐개혁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것을 봤다. ‘만약 지금의 1000원을 1원으로 바꾼다면?’ 역사시간에 배웠던 ‘도량형 통일’, ‘화폐단위와 문자통일’ 같은 개념들이 생각났다.    

 

4. 7(1) / 넒은 호수에서 만난 동물 친구들

오리는 죽어서도 물에 둥둥 떠 있나? 오리는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 물에 떠있다. 다만 살아있을 때는 물속에서 끊임없이 발을 휘젓고 죽었을 때는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겠지. 살아있을 때는 떠있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죽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니. 오리야, 너도 참 허무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구나. 그나저나 봄날 호수에서 헤엄치는 잉어들은 꼭 떨어진 꽃잎 같았다. 꽃잎이 물에 떠다니듯 느릿느릿 잘도 헤엄쳤다.      


4. 4 / 200세 시대

진짜 100세 시대가 왔을 때는 한 평생을 200세라고 계산할 때일걸? 인생이 생각보다 짧은 것을 직시하고 싶지 않을 테지만.     


4.3 / 인공눈물

눈은 기꺼이 눈물을 필요로 한다.     


4. 2 / 마트에서

당시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메모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렇게 적혀있었다. ‘휠체어에 장을 보는 할아버지.’     


4. 1/ 한 때는 정말 친했던 친구

예전에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오랜만에 보이스톡이 온 친구와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다. 이곳 생활이 생각보다 얼마나 외로운지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그 친구가 다 듣고 하는 말이 “넌 왜 이렇게 부정적이니”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징징거리는 게 지겨워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 말이 너무 서운했고 지금도 종종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꼭 그 일 때문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 친구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래, 나 부정적이다, 그게 어때서?  




사실 그는 이것 외에도 많은 말들을 남겼지만, 4월에 한정지어 그가 오기 직전부터의 기록들을 띄엄띄엄 적어보았다.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을 잘 갈고 닦아서 시의 한구절로, 소설 속 인물의 대사 한마디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수선한 메모장 정리를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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