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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경 Jan 13. 2020

보편적인 아Q들 [서평]

루쉰 《아Q정전》

아Q정전을 쓴 자는 아Q의 '아'만이 확실한 뿐 아Q의 성도 호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아Q의 'Q'는 무슨 의미일까?
 
아Q의 정신승리법을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은 나에게 많은 Question(질문)을 갖게 했다. 아Q는 맞거나 괴롭힘을 당해도 "난 벌레야. 난 벌레여서 맞았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한다. 노름판에서 딱 한번 이겨 따낸 돈을 다 빼앗긴 후에도, 오히려 자신의 뺨을 때리면서 남에게 분풀이를 했다며 의기양양해한다. 도대체 아Q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Q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모멸을 통해 정리 승리를 할수록 더 깊은 노예근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걸까? 아Q의 첫인상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루쉰은 아Q를 통해 Queue(변발)의 중국 민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1900년대 초 외세의 공격에도 자존심, 자기 합리화를 앞세우는 중국 민족에 대한 은유이다. 신해혁명에 임하는 혁명가 아Q의 모습에서 그 비판은 절정에 달한다. 아Q는 혁명의 의미나 목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혁명은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반역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혁명군에게 겁을 먹는 것을 보고, 곧 혁명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다시 말해, 아Q는 자신의 이익과 복수를 위해 혁명을 지지하는 반쪽짜리 혁명가인 것이다. 이는 신해혁명을 실패로 이끌었던 위안스카이의 태도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해혁명은 본래 쑨원이 주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위안스카이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대신 차지한 중화민국의 대총통의 자리에서 독재를 하며 자신을 황제로 선언하기 때문이다.
 
혁명가 아Q를 보면서 김수영 시인의 시 <기도>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 시에서 화자는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살쾡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 (중략)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라고 이야기한다. 배암, 쐐기, 쥐, 살쾡이, 진드기는 혁명의 대상을 상징하는데, 화자는 혁명의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자리에 서게 되더라도 '우리'가 바랐던 혁명을 끝까지 잊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직후 쓰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김수영은 혁명이 한 사람의 힘만으로, 관념적인 구호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김수영을 비롯한 4.19 혁명 주체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박정희 독재 정권이 등장한 것은 앞서 언급한 신해혁명과 유사한 역사적 흐름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아Q같은 혁명가는 이제 그만 Quit(그만두다) 해야 한다. 구조는 유지된 채 기득권층만 교체되는 혁명은 아Q식 혁명일 뿐이다. 진정한 혁명이란 근본적인 구조의 전환을 동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 못지않게 혁명 이후에도 그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2016년 말부터 2017년까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촛불 혁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혁명의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도 호도 분명치 않는 아Q는 언제 어디든 존재할 수 있기에, 누구든 아Q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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