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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경 Jan 13. 2020

모두의 무기명 혹은 없는 기명 【시】

새해 인사

모두의 무기명 혹은 없는 기명


1. 무기명씨는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치약 냄새가 나는 핸드크림을 바른다.

2. 무기명은 밤을 담은 손에 입김을 불어넣을 줄도 알았다.

3. 그는 시금털털한 연기는 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무참한 웃음을 내보였다.

4. 투표소를 나오면서 무기명씨는 투표용지에 ‘무기명’이라 기명했노라고 깜찍하게 속삭였다.

5. 그의 부모는 그의 이름을 특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기가 해가 뜰 때마다 우는 것을 보며 새벽에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6.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기명씨 안녕히 가세요.”했는데, 그는 자신이 무의 성격을 가졌으니 앞으로는 ‘기명’이라 불러주면 된다고 했다. 당시에는 내가 저 사람을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으나, 지금은 그가 무의 성격을 가졌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7. 나도 새벽에 무기명씨를 부르기 위해 깬 적이 있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다시 창을 닫았다. 방안에 훅 들이친 쌀쌀한 공기가 오히려 그 같았다.

8. 무기명씨를 떠올리면 계속 기명, 기명하게 된다.

9. 기명은 자신을 깜짝 놀라는 발음으로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10. 무기명은 무를 집어 들었다. 가게의 무들은 모두 10원씩 차이가 났다. 10원만큼 못생기고 맛이 없는 것은 무엇이지? 어쨌든 무는 참 하얗고 맛있는 것이잖아. 무기명은 무처럼 아삭하게 웃어 보였다. 

11. 가끔씩 무질서한 나열의 글자들을 붕붕 띄우고는 내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12. 무기명을 무작위로 섞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기명씨 저기 저 멀리 가서 서세요. 제가 이쁘게 찍어드릴게요.

13. 기명의 사진을 보며, 기-명, 그처럼 웃어 보이는 연습을 했다. 이 사진 말이야, 내가 찍었는데 내가 찍힌 것 같다. 이명처럼 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14. 기명과 무기명 사이에 ‘나의 그'가 소용돌이친다.빨.
려.
들.
어.
간.
다.윗 문장의 순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워크룸 출판사의 좋은 책들을 발견했다. 새해 첫 책으로 《잠재문학실험실》을 잡아들었다. 원래는 완독 후 '무기명'에 대한 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책이 잘 읽히지 않아 시를 먼저 마무리했다. 그래도 《잠재문학실험실》의 첫인상이 조금은 담긴 것 같다.

새해에는 꽃길만 걸을 거라며 좋을 일만 있을 거라며 응원하고, 웃어보이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매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걸음으로 걷지 않았던가? 올해도 그렇게.


(퇴고 후)


1. 무기명씨는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치약 냄새가 나는 핸드크림을 바른다.     


2. 무기명은 밤을 담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을 줄도 안다.     


3. 그는 시금털털한 연기를 하는 법이 없고, 가끔씩 무참한 표정을 내보인다.     


4. 투표소를 나오면서 무기명씨는 투표용지에 ‘무기명’이라 기명했노라고 깜찍하게 속삭였다.     


5. 그의 부모는 그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 아이가 해가 뜰 때마다 우는 것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6.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기명씨, 가는 거예요?” 했는데, 그는 자신이 무의 성격을 가졌으니 기명이라 부르면 충분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지금은 그가 정말 그런 성격을 가졌는가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7. 새벽에 무기명씨를 부르기 위해 깬 적이 있다.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몰라 다시 창을 닫았다. 방안에 훅 끼친 쌀쌀 맞은 공기가 오히려 그 같았다.     


8. 무기명씨를 보고 있으면 기명, 기명하게 된다.     


9. 가게의 무들은 10원씩 차이가 났다. 10원만큼 못생기고 쓸모없는 것이 무엇이지? 어쨌든 무는 참 하얗고 맛있잖아. 무기명은 무처럼 아삭하게 웃어보였다.     


10. 그를 무작위로 섞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기명씨 저기 저 멀리 가 서세요. 제가 이쁘게 찍어드릴게요.     

11. 이 사진 말이야. 내가 찍었는데 내가 찍힌 것 같다. 이명처럼 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부터 십일까지의 순서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모두의 없는 기명」    


대산대학문학상에 응모하기 위해 이곳에 적어두었던 몇 편의 글들을 퇴고했다. 그동안 쓴 글들을 모아놓고 보니 좀 쓸쓸하기도 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너'라는 단어를 곳곳에 추가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굳이 '너'라고 호명할 필요가 없었다. 쓸쓸하면서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한참 전에 문학상 수상 발표가 났는데, 그때 나는 심사평을 읽으면서 내가 당선, 아니 본선에 진출한 줄 알고 깜짝 놀랐었다. 심사평에서 '무기명씨'를 만날 줄이야.


"말하자면 시적 기량에 걸맞은 개성과 참신성을 갖춘 작품을 찾는 일은 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대체 왜일까. 잘 쓴 시는 많은데, 좋은 시를 찾기란 왜 이다지도 힘든 것일까. ‘잘 쓴 시’와 ‘좋은 시’의 극명한 차이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다. 화려한 외관에 이끌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시를 읽을수록 허탈한 감정이 커졌다. 어쩌면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그 자체에 대해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만 무작정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했다.     

세 명의 심사자들이 전체 투고작을 살피는 데에는 11월 한 달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12월 중순 14명의 작품을 선별, 본심에서 토론했다. 응모작의 수준이 고른지 등을 살펴 최종으로 5명의 작품을 뽑았고, 이어 재차 정독과 논의의 과정을 거쳤다. 당연히 그 원고들은 모두 무기명이었다. 최종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타히티」 외 4편, 「예약석」 외 4편, 「여름나기」 외 4편, 「새가 머리를 조아리는 저녁」 외 4편, 「귀로」 외 4편이다. (박소란, 이병률, 임승유 / 제 19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심사평 중에서)"


요즘 같이 추운 겨울날에는 무기명씨가 더 자주 생각난다. 춥지 않을 때 그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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