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동성 친구에게 고백을 받았다.
“나 너가 동성으로 느껴져.”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동성으로 느껴지다니?”
“왜 못 알아들어. 내가 너 좋아한다는 뜻이잖아.”
이 대화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을까. 사실 나에게 위와 같은 일은 없었다. 상상을 위해 상황 설정을 한번 해본 것이다. 위 상황에서 어떤 한 단어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어떤 단어일까. 동성이라는 단어가 이성으로 바뀌면 좀 자연스러워질까.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MC가 패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모습을 종종 봤었다.
친한 친구가 이성으로 느껴질 때가 있나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을까요?
이 질문들을 들으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패널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한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로 지낼 수 있다와 없다는 두 의견으로 갈려 논쟁을 펼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전제되어 있는 조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 생각해 본다. 위 질문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표현 그 자체로만 놓고 봤다. ‘이성’으로 느껴지는 것과 ‘동성’으로 느껴진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일까? 당연히 이성은 이성이니까 이성으로 느껴지고, 동성은 동성이니까 동성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않을까?
'친구가 이성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어떤 이가 이성애자라는 전제하에 이성인 친구에게 설렘 또는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뜻으로 통용적으로 쓰인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같은 맥락으로 이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럼 동성애자가 동성 친구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때는 ‘동성으로 느껴진다’라고 표현해야 할까?
저런 질문을 할 때는 그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 이성애자라고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 이성애자라고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자기의 성지향성을 밝히지 않았을 때는 당연하게 그를 이성애자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지향성이 무엇인지를 미지수로 남겨두는 게 맞다. ‘이성으로 느껴진다’라는 이 관용적 표현은 이성애자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성소수자를 비가시화하는 일이다. 방송 대부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성애를 전제로 하고 진행이 된다. 원칙상으로는 관련 발언이 나올 때마다 괄호를 치고 '이성애의 기준에서'라는 말을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그러한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는 출연진들의 이야기로부터 배제된다.
비슷한 말로는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따라오는 설명으로 술과 밤이 있다면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이것 또한 철저히 이성애 중심적인 발언이다. (헤테로) 남성과 (헤테로) 여성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표현하면 모를까.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이 발언의 전제조건부터 다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독일에 도착한 지 몇 달 지나고 어학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진행된 토론의 주제는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였다. 그때 사실 난 토론의 전제 조건부터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 토론이 진행이 되려면 '이성애의 기준에서'라는 표현이 먼저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 설명은 생략되고 토론이 진행됐다. 동성애자의 입장에서 똑같은 질문을 하려면 '동성도 친구가 될 수 있냐'라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성별 구분 없었다면 이런 토론 주제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친구가 연인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대충 알아들었으면 됐지 뭘 그리 따지고 드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불편해하는 것이 내 재능이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몇몇 사람들은 강력하게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반대로는 친구가 될 수 있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성애 관계를 바탕으로 한 근거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나는 당연히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말한 가장 큰 근거는 성소수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토론 내내 "호모 섹슈얼에 대해선 생각 안 해봤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고 유별나게 보일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냥 적당히 다른 이유를 둘러대고 토론을 마쳤다.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끼리 모여있는 곳이라고 해도 독일이 퀴어 문제에 대해서 열려 있는 편이고 어학원 수업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오고 갔어서 사람들이 퀴어 문제에 대해 열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성소수자에 대해서 따로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여남은 친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대화 주제 안에서는 부연 설명 없이 당연히 이성애를 전제로 생각하게 되어야 한다는 점이 답답하고 아쉬웠다.
그럼 친구가 이성으로 느껴진다는 표현과 여남 사이에는 친구가 없다는 표현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전자에 대한 대안으로는 "친구에게서 연애 감정을 느끼니?" 혹은 "친구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니?"라는 걸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후자의 여자 남자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것은... 그 토론 주제가 나왔을 때 나처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빨리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토론 주제의 전제부터 짚고 넘어가다간 예민 보스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