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의 독서
한 줄 소감 :
광대한 상상과 방대한 지식, 대단한 통찰과 대담한 전개, 화려한 연출과 수려한 표현
넷플릭스에 <삼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떴다는 것을 예전에 얼핏 들은 적 있다. 삼체라는, 전혀 그 뜻을 가늠할 수 없는 생소한 단어에 호기심이 일었다. 소설이 원작이라길래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 했더니만, 세상에나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예약 대기줄이 어마어마했다. 눈독을 들인 지 몇 달 만에 겨우 빈틈을 파고들어 1권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은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권마다의 볼륨이 상당하기에 다 읽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린다(다 합치면 2000페이지 정도 된다. 나는 3주 정도에 걸쳐서 다 읽었다). 책은 구판이 있고 개정판이 있는데, 각 버전별 표지 디자인이 재미있다. 구판은 세기말 감성이 도드라지고, 개정판은 깔끔하고 예쁘다.
책의 저자는 류츠신이라는 중국인이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는데, 이 작품을 통해 휴고상까지 수상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SF작가였다. 작가는 공학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퇴근 후에 틈틈이 소설을 집필하여 출간하였고, 출간할 때마다 중국 SF문학상인 은하상을 꼬박꼬박 수상했다고 한다. 그만큼 성실함과 실력을 고루 갖춘 작가인 것이다.
이 책은 외계문명의 침략을 마주한 인류의 모습을 다룬 스페이스 오디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 자체는 굉장히 진부하다. 그러나 이것을 전개하는 규모, 그리고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며 거침없이 전개해 나가는 실력이 정말로 탁월하다. 이 책은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통과해 나간다. 현재 시점의 지구 문명에서 시작하여 상상도 못 할 먼 미래까지, 그리고 지구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늠도 안 될 먼 우주까지. 또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비롯한 굵직한 동서양사, 작품을 굉장히 하드하게 만드는 다양하고도 촘촘한 물리학•천문학•공학 지식, 인간의 본성과 문명의 명멸을 꿰뚫는 인문학적 통찰을 한 데 엮어놓았기 때문에 이야기의 무게와 밀도 자체가 엄청나다. 이야기의 배경은 가없이 드넓고, 그 안을 채우는 내용은 한없이 무거운데,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망설임 없이 다루며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밀어나간다. 이러한 와중에 세밀한 묘사와 기막힌 비유로 작품 전반의 순수문학적 가치를 고양시키는 표현력과 문장력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작가와 작품이 세상에 또 있을까.
각 권마다의 주요 주제와 주요 인물이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다. 1권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중심으로 한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통찰, 2권은 본격적으로 외계문명에 맞서 대응하는 인류의 모습, 3권은 우주 전체를 배경으로 한 상상력의 종극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테마의 변화 및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들이 자연스럽게 교체되는 모습도 굉장히 인상 깊었다. 세 권 전부 재미있지만, 특히 2권은 정말이지 압도적으로 재미있다.
이 책이 개인적으로 더 재미있고 아름답게 다가왔던 이유는, 이러한 거시 문학이 한국문학엔 잘 없기 때문이다(물론 나의 부족한 독서량에 의해 아직 내가 그런 한국작품을 못 읽어본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의 내면세계, 이슈되는 사회문제, 인간관계의 역학 등을 다루는 작품들은 많지만, 이 작품처럼 인간의 문학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그 끝을 보고야 마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스케일의 문학은 쉽게 접할 수 없다. 아마 그 이유는 그러한 작품을 집필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을 읽는 3주 내내 나는 지구가 아닌 우주에 머물며 수많은 항성과 차원을 넘나들었다. 회사생활이고 뭐고 내 삶은 찰나인 동시에 우주의 티끌에 불과하다고 느끼며 멋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이 책은 인류문명이 우주에 남긴 예술작품이다. 정말 멋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