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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유모차에 새똥이 떨어지면 버틸 수가 없다

by 야간선비

새로 산 유모차에 새똥이 떨어졌다. 병원에서 아이에게 2차 독감주사를 맞히고 나서였다. 아내는 아기를 안고서 집까지 걸어가고 싶다며 먼저 떠났고, 나 혼자 병원 야외주차장에 남아 차에 유모차를 집어넣기 위해 트렁크를 열었을 때였다. 열린 트렁크 앞에 유모차를 잠시 세워둔 뒤 조수석에 기저귀가방을 막 싣는 그 찰나에, 유모차를 등지고 있던 그 몇 초 사이에 낙분落糞 사태는 벌어졌다. 검은색 유모차에 묻은 하얀 덩어리는 그것이 필시 새똥이라는 것을 그 색감의 극적 대조를 통해 확증해내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고 분노가 들끓었다. 비둘기인지 까마귀인지 뭔지 모를 그 새는 흰색과 녹색이 섞인 똥 한 덩이를 침을 뱉듯이 찍 뿌려놓고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백변白便을 투하한 새는 이미 날아가고 없는 텅 빈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그러고서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구시렁거리면서 물티슈로 유모차를 연신 벅벅 닦았는데, 그것을 기점으로 인내심과 침착함의 담벼락은 무너지고 지금껏 가둬왔던 피로와 짜증이 탈옥수처럼 뛰쳐나와서, 그 감정들이 날뛰며 나의 마음 여기저기를 부수고 때리고 불지르는 소요騷擾 사태로 인해 내 마음속은 불바다를 이루었다. 새똥 따위를 닦고 있을 시간에 벌써 차를 몰고 집에 도착해서 점심이라도 해 먹었을 것이다. 할 일은 많고 바빠 죽겠는데 유모차 시트는 언제 또 분리해서 세탁하나. 새똥만 아니었어도 아꼈을 시간이 아깝고, 할 필요가 없었던 잡일이 갑자기 추가됨에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비상금을 헐고 절량絕糧을 감수하며 큰맘 먹고 새로 장만한 72만 원짜리 휴대용 유모차에 새똥이 묻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이 뻗치는 것이 아니었다. 여태 아무리 바쁘고 어렵고 힘들어도 그저 입 꾹 다물고 꾸역꾸역 잘 버텨내고 있었는데, 거기에 새똥을 뿌리다니 말이다. 이것은 모욕이었다.


물티슈로 박박 닦고서는 아내에게 곧바로 사진 찍어 보낸 유모차 상태. 새똥에 오염된 유모차 시트는 유모차로부터 분리해 낸 후 중성세제와 미온수를 이용하여 손세탁해야 하는데, 말만 들어도 벌써 귀찮고 번거롭다.


내가 평소와는 다르게 화를 내고 열받아하는 티를 내니 아내가 내심 놀랐나 보다. 아내는 그래도 아기 머리에 새똥이 떨어지지 않은 게 어디냐며, 마침 유모차에 아기가 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오늘 하루는 어쩌면 꽤 운이 좋았던 것이라 말해주며 나를 달랬다. 메마른 마음에 들불처럼 번졌던 화는 아내가 조용히 뿌려주는 지혜로운 가을비에 금방 잦아들었다. 나는 지금 탄내 나는 내 마음 위를 서성이면서, 마음바닥에 굴러다니는 그을린 검댕조각 몇 개를 주워서는 그것들을 연필 삼아 지금 이 글을 끄적이고 있다.


여유 공간 없이 촘촘하고 빽빽한 삶은 사소한 것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진다. 버티는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할 일은 많은데 감기 기운이 도지거나 급하게 걸어가는 출근길에 신발끈이 풀리면 서러움이 북받치고 울화가 치민다. 체력의 바닥과 정신력의 벽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일어나면 나름 견고했던 댐은 순식간에 무너지고야 마는 것이다. 씩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다가도, 사소한 것들에서도 의미를 찾아 내면의 정원에 꽃을 심다가도, 오늘처럼 한 번씩 감정의 교도소가 무너지고 인내의 댐이 붕괴되면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 난장판으로 부서지고 망가져서 진절머리가 나게 되는데, 이때 삶의 관점은 순간 돌변하여 모든 게 그저 싫고 원망스럽다. 버티며 살다 보면 가끔씩 그리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버티는 삶이란, 대단하거나 위대한 사업(business)을 일구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하찮으면서도 그저 바쁘기만 할 뿐인데(busyness), 이 저품질의 무거운 삶은 인간이 평생 동안 벗어내는 일상의 허물과 인간관계에서 떨어져 나오는 지저분한 부스러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빡빡하게 꽉 채우는 지극히 하찮고 성가신 일들 - 쓸고 닦고 빨고 개고 채우고 비우는 가사노동은 물론이요, 왕처럼 군림하는 직장 상사의 거들먹거림을 인내하고 쉬는 날에도 울려대는 회사 톡방을 감내하면서 이 모든 속내를 모두의 앞에서 감추어내야 하는 감정노동까지, 끝을 모르고 반복되는 안팎에서의 노역이 내일과 모레와 글피를 넘어 무덤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사소하고 시시한 잡무들과 진저리 나고 넌더리 나는 관계들에 하루는 벌써 저물어간다. 이 모든 걸 버티며 살아가는 와중에 살림살이는 나아지질 않는다. 키우는 아기가 커갈수록 돈은 더 들어간다. 만 6개월을 넘긴 아기는 더 많은 분유와 더 많은 기저귀와 더 많은 육아장비를 요한다. 목청이 좋아지고 혓바닥과 목울대에 조금씩 힘을 주기 시작하는 7개월 차 아기의 울음소리는 찢어지는 천둥과도 같다. 집안일과 바깥일이 비처럼 쏟아지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벼락을 친다. 하찮음이 휘몰아치는 태풍 같은 하루하루에 심신은 지치고 계좌 잔고는 깎여나가며, 아뜩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서 매일매일을 겨우 버텨내고 있는데, 없는 돈에 거금을 들여 장만한 새 유모차에 새똥 따위가 떨어지게 되면 속절없이 터져 나오는 울분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이 '너의 삶은 하찮구나'라는 인증도장을 새똥으로 날인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노릇이므로, 조용히 화장실에 기어들어가서는 뜨거운 샤워물을 목덜미로 맞아내며 욕조에 떨어지는 물소리에 깊은 한숨소리를 숨긴다.


하늘을 날지 않는 닭에게 오늘 벌어졌던 공중방변의 죄를 물을 순 없겠으나, 유모차에 똥을 뿌렸던 그 불상의 새가 속한 조류 전체에게 복수하고자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어야 한다며 아내를 졸랐다. 너저분했던 감정을 따뜻한 치킨과 시원한 콜라로 닦아내린다. 보복의 저녁식사로 불러온 배를 부여잡고서 나는 이런 시답잖은 글로나마 오늘의 밑바닥에 아직 남아있는 감정의 오니汚泥를 처리한다. 괜스레 심통을 부렸던 스스로가 멋쩍고 민망하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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