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매일 아침 7시 언저리에 일어난다. 밤새 그렇게 칭얼대다가도 아침에 일어나면 울거나 보채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동그랗고 차분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거나 조막손으로 이부자리 여기저기를 만지작대며 혼자 놀고 있다. 그러다가 아내 또는 내가 다가가서 인사하면 아기는 햅쌀을 씻어낸 쌀뜨물처럼 뽀얀 얼굴을 한 채 아침처럼 맑게 웃는다.
일어난 아기의 얼굴을 닦아주고 밥을 먹인 뒤에 아기를 안고서 집을 나선다. 아기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니면 모든 이들이 반겨주는데, 일면부지의 행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것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인바 이것은 아기가 내 품 안에 있어 가능한 일이다. 아이를 품에 안고 다니면 마치 겨울햇살을 안고 다니는 것과 같아서, 주변 이들의 얼음장처럼 굳어있던 얼굴을 녹이고 차갑게 닫혀있던 입을 열게 만든다. 길을 가다 만나는 이들은 품에 안긴 아기를 보며 웃거나 말을 걸어오고, 그러면 적막한 엘리베이터와 삭막한 지하철에 잠시나마 온기가 퍼지고 생기가 돈다. 아기는 아직 낯을 가리지 않아서 만나게 되는 모두를 향해 빵긋 웃어주는데, 그러면 그들에게 남아있던 경계심은 남김없이 녹아 없어지고 웃음꽃은 기다렸다는 듯 온 얼굴에 만개한다.
아기를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은 각자의 사정마다 제각각이다. 자신의 손주 얘기를 하는 할머니도 있고, 곧 출산하게 되는 아기 얘기를 하는 예비부모들도 있고, 자신이 이미 다 키워놓은 자식들의 옛 시절을 이야기하는 아저씨도 있고, 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귀엽다고 하는 네 살배기 아이도 있다. 그중 할머니들의 반응은 남다르다. 할머니들의 눈은 매섭다. 할머니들은 아기가 예쁘다는 말보다도 아기가 추워 보이니 더 두꺼운 양말을 신겨야 한다거나 아기 피부가 건조해 보인다며 로션을 듬뿍 발라줘야 된다거나 등등의 이런저런 보완책을 초면인 나와 아내에게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 잔소리는 지적 내지 핀잔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아스라이 멀어진 옛 양육의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선의의 한마디이며, 이는 심장 깊숙이 뿌리내린 모성애가 초면이라는 관계조건을 앞질러 부지불식간에 발동되기에 생기는 일이다. 남의 집 아기를 제집 아기 보듯이 보기에 남의 집 아기가 신고 있는 양말의 두께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연신 아기가 귀하다고 말한다. 할머니들에 따르면 옛날에는 길 가는 젊은 여자 열에 여덟은 전부 아기를 매달고 다녔다고 한다.
6개월 된 아기는 무해하다. 그 순백의 무해함으로 인해 주변의 모든 이들은 무장해제한다. 경계의 쇠사슬을 내려놓고 무관심의 철문을 열어젖힌 채 모두가 아기를 쳐다보며 웃고 떠들고 그렇게 너와 나를 넘나든다. 아기는 그렇게 존재만으로 가족과 이웃과 사회구성원들을 연결시켜준다. 평소 기나긴 설명과 집요한 설득과 끝없는 설파로도 서로 소통이 되먹질 않고 당파싸움과 경제문제와 이념대립과 종교갈등의 아수라판 속에서 다투고 반목하는 수많은 어른들이 아기 한 명으로 순간이나마 하나가 되는 장면은 귀하다.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지만 그 말 못 할 귀여움과 소중함으로 모두를 일시에 가깝게 만들기에, 말이라는 것은 어쩌면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어른들은 여지껏 말이 너무 많았다.
아기를 키워보니 전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다. 웬만한 시설엔 수유실이라는 게 이미 다 있었구나···. 식당마다 아기의자가 몇 개씩은 어련히 있기 마련이구나···. 장 보러 간 곳의 수유실이 생각보다 쾌적하거나, 가고 싶은 식당에 아기의자가 있으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는데, 이것들은 내가 아기를 갖기 전에도 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었으나 단지 내가 여지껏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인지적 개벽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변화는, 사는 동네가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도로가 좁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유모차를 끌 수가 없다. 따릉이 대여소마저 존재하질 않는다. 아기가 좀 크더라도 자전거나 킥보드 같은 것은 사고가 우려되어 절대 타게 할 수가 없다. 아마 아기를 낳고 난 후에 집을 골랐더라면 지금 동네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 딸린 맞벌이 부부’는 모든 사회분야에 걸친 각종 니즈needs의 총집합체다. 초등학교를 보낼 때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지의 여부, 인근 국공립어린이집의 개수, 근처 소아응급실의 유무가 왜 그렇게 부동산가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절로 알게 된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최고최선의 행동양식이다. 애를 낳고 길러보니 감겨있던 눈이 이제야 떠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인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아기로 인해 뒤늦게나마 개화開化되었음에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내 삶의 항구에 쉼 없이 들어오고 있다.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본격 시작이다. 아기의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고, 놀아주고, 재워야 한다. 아기는 피곤해도 스스로 잠드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부모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꿈나라 입구까지 매번 직접 데려다주어야만 한다. 해야 할 집안일이 아직 잔뜩이고 내일 또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준비를 해야 하는데 시간은 벌써 밤 10시를 향해간다. 아기는 피곤하다고 칭얼대면서도 잠을 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체력과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진다.
그렇게 칭얼대는 아기를 눕혀놓고서 가슴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고 자장가를 불러줘도 소용이 없으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아기를 안아 올리는데, 그러면 아기는 또 날 보고 배시시 웃어 보이는 것이다. 얘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는 것인가. 그때 아내는 말했다. 아기는 우리를 보면 항상 웃어준다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아, 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쪽은 부모가 아니라 아기였다. 아기는 부모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토록 기쁨에 겨워한다. 나는 아기가 이유식을 먹으며 온 사방을 음식찌꺼기로 도배하면 그걸 또 언제 치우나 싶어 한숨부터 쉰다. 아기가 기저귀에 똥을 싸면 그 똥냄새에 인상을 찌푸린다. 밤중에 아기가 울며 보채면 피곤함에 버거워하면서 한 시간 단위로 깨는 아기를 원망한다. 아기가 음식을 흘리고 똥을 싸고 잠을 설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나는 그걸 모르고서는, 힘들고 어렵게 가진 귀한 아기라는 사실을 그새 잊어버리고서는 아기 돌보는 것이 맘처럼 되질 않는다는 이유로 갓난쟁이를 상대로 토라지고 화를 내고 인내심 따위를 운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기는 이토록 부박한 성정의 아비를 보면서 언제고 웃어준다. 내가 아기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사랑을 베푸는 쪽은 되려 아기였고, 투정 부리는 쪽이 바로 나였다. 부모의 얼굴만 보여줘도 꽃이 피듯 웃어주는 아기. 아기는 나를 쳐다보면서 씨익 웃으며 헤헤 소리를 내기도 하고, 신이 나서 꺄르륵대며 팔을 휘젓다가 제 웃음에 못 이겨 몸이 발랑 뒤로 넘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움직임을 멈춘 채 연못 위의 나뭇잎과도 같은 조용한 미소를 가만히 띄우기도 한다. 웃는 것에 다른 이유는 없다. 보이는 게 나여서 웃는 것이다. 시선에 내가 머문다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
가족과 이웃을 웃게 하고 몰랐던 것들을 하나둘씩 알려주고 조건 없는 사랑을 부모에게 베푼다. 200일 된 아들은 내가 못하는 것들을 숫제 해낸다. 이만하면 되었다. 별달리 바랄 것도 더 가르칠 것도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