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나갔다가 집엘 오면, 남들 앞에서 굳게 닫혀있던 입이 그제서야 열리면서 속 안에 쌓였던 말이 미주알고주알 쏟아져 나온다. 참았던 말들과 숨겼던 표정들을 한껏 참았다가 아내 앞에서 풀어놓으면 갑갑했던 마음이 개운히 환기되고 뿌옇던 머릿속 안개가 말끔히 걷힌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랜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보아도 그간 만나지 못했던 나날 동안 각자의 사정이 새로이 생기고 놓여진 상황도 전부 다 달라져서,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고 상대가 하는 말이 나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상대를 상처 주고 서로의 의중을 맞히지 못하는 오발과 일탄逸彈의 대화만을 주고받다가 집에 오면 비로소 나는 나의 뜻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우親友인 아내를 마주하게 되고, 그제서야 나의 말들은 언어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대화다운 대화가 작동하게 된다. 아내는 나의 모든 인간관계를 대체한다. 아내는 나의 배우자이자 친구이자 동료이자 부모이자 스승이며, 결혼으로 서로의 영혼조각을 나눠가짐에 이젠 때때로 그녀가 나 자신이기도 한데, 따라서 나는 나의 아내 하나만으로 나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아내를 만나면 모두를 만나는 것이고 아내와 얘기를 나누면 모든 이들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므로 나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이렇듯 서로의 말이 곧잘 통하고 일방의 메시지가 상대방에게 왜곡 없이 전달되면 어느샌가 말하기 전부터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미리 알게 되는 예언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말이 잘 통해서 도리어 무언無言으로 접어들게 되는 일심一心의 부부관계는 복되다. 그러나 이러한 사용언어의 최적화와 심리상태의 동기화만으로 부부지간이 쉬이 유지될 수는 없다. 부부가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수다만 떨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건너편 주방에는 설거지거리가 잔뜩이고, 어느새 아기의 목욕시간도 다가온다. 다 마른 수건과 속옷들도 개켜야 한다. 아기가 잠들면 아기 장난감을 소독하고 젖병을 세척해야 한다. 그렇게 겨우 침대에 몸을 뉘이면 새벽 매시간마다 잠에서 깨어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러 퀭한 눈을 한 채 꼬박꼬박 아기 방으로 향해야 한다. 암만 비좁은 집이라 해도, 집 안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실제로 해보니, 부부에게 있어 집안일의 분업이라는 것은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당신이 이것을 하고 그것을 하면 나는 저것과 나머지를 하겠다는 식의 업무분장은 한 번 나누는 순간 '그 일은 네 일이지 내 일은 아니지 않느냐'와도 같은 심적 경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분명히 하기로 했던 설거지를 여태 해놓지 않은 것이 눈에 보이면 일단 화부터 나면서 상대를 채근하게 되는 것이고, 채근을 당하는 쪽 입장에서는 회사에서 회사일로 싫은 소리만 듣다 왔는데 이번엔 집에서 집안일로 싫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넌덜머리가 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부부는 그날 하루의 마무리를 서로 사이좋게 엉망으로 만들고야 만다.
오히려, 집안에서의 모든 일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배분보다는 비합리적인 자발성이 필요하지 싶다. 이 말인즉슨, 이걸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근거의 제시를 요구하거나 손익을 계산함이 없이, 그저 갓 자대배치된 이등병과도 같은 자세로, 해야 할 일이 그 무엇이든 간에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무조건반사와도 같은 대답과 함께 바람처럼 청소를 하고 벼락처럼 설거지를 하고 번개처럼 빨래를 개야만 한다. 그렇게 하게 되면 상대로서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그러면 그렇게 집에는 또 한 명의 이등병이 생기게 되고, 이제는 부부 이등병 서로가 너나 할 것 없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나누어 하게 된다.
물론, 실제로 우리 집 안의 유지보수와 우리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관장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다···. 집 구석구석 아내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거실 커튼레일에 박힌 나사부터 냉장고 안에 있는 아기의 이유식까지, 아내는 업종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한다. 분명 나와 아내는 똑같이 손이 두 개인데 아내는 나의 열 배의 몫을 거뜬히 해내고도 남음이 있어서, 한 두 개만을 가지고서 세월아 네월아 조물딱거리는 나를 저만치 앞에서 가만히 기다려준다. 또 그 바쁜 와중에도 양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과 조부모님께의 안부전화를 챙기고, 아기가 자는 틈을 이용해서 운동까지 틈틈이다. 내가 틈틈이 하는 것은 맥주를 마시는 것뿐인데 말이다.
쉴 새 없이 동분서주하며 바지런히 움직이는 아내를 보며 깨닫는다. 부부지간의 사랑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실함이 필요하구나···. 사랑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며, 열심히 사랑해야 그것이 사랑이구나···. 사랑이 사랑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랑 뿐만이 아니라 성실함과 민첩함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나는 나의 아내를 보면서 저절로 알게 된다. 그냥 그 자체로 유지되는 결혼생활은 없다. 오히려 결혼까지가 어찌저찌 알아서 되는 것이고, 결혼 이후부터가 진정한 시험과 실험의 시작인 것인데, 각고의 노력과 세심한 정성이 생활 여기저기에 깃들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 불을 피워내는 건 순간이지만 불을 꺼트리지 않고 유지하려면 장작을 넣어주고 비바람도 막아주고 풀무질도 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부부 간의 사랑도 이와 매한가지다. 쉼없는 관심과 노력 없이는 결혼생활이 유지되기 힘들다. 연애 시절 때의 불꽃 튀는 사랑으로 불을 붙였으니 이제는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해로偕老의 기간 내내 잘 살펴보아야 한다. 소파에 누워 유튜브만 보고 있으면 타오르던 불은 처음 같지가 않고 서서히 꺼져만 가게 되므로, 따라서 불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장작을 넣지도 않으면서 계속 타오르길 바라는 사랑은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잘못된 사랑일 게다. 게으른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런 말을 게으른 남편이 제 얘기하듯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은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니며 합리로 기능하지 않는다. 사랑에 논거와 계산이 들어서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다. 사랑은 ‘사랑하니까‘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일거에 납득시키므로 논리를 비약하며, 그 거대한 단순성이 모든 자리를 차지함에 합리가 자리할 공간은 없다. 결국 무논리와 비합리만이 사랑의 원리이며, 따라서 부부는 서로에게 이유가 없어야 하고 서로 간에 하는 일들은 이치에 합당하질 않아야 한다. 동시에, 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직접성과 물리성만이 그 사랑을 증명한다. 결국 성실함과 기민함을 바탕으로 집안 여기저기에 닿는 고된 손길만이 사랑을 실제로 기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랑의 실질과 절차를 나는 나의 아내로부터 배웠다.
아내의 속도와 능률을 따라갈 순 없겠으나 나 또한 나만의 방식대로 꾸준히 아내를 위해보려 한다. 군기軍紀라는 것을 매우 싫어하지만, 그것이 만일 필요하다면 그 영역은 사랑에서다. 이등병처럼 아내를 사랑해야겠다. 아내가 나에게 이미 그리해주는 것처럼.
* 2024. 10. 24.(목)에 발행 예정이었던 14회차 글은 가족여행으로 인해 1주일 뒤인 2024. 10. 31.(목)에 발행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