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냉장고와 침대와 탁자를 하나씩 놓으면 끝나는 작은 집처럼······. 나만의 취향을 여기저기 배치하기엔 일상의 공간은 비좁다. 취향趣向이라는 것은 '뜻이 가는 대로'라는 의미인데, 즉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좋아 보이는 것들을 장바구니에 마구 담기엔 돈이 모자라고,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다. 해야만 하는 일상의 과업을 위해 나는 나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들은 정해져 있고, 오늘과 내일의 동선은 어제와 같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샌가 취향이 없다. 취향을 없애면 효용과 본질만이 남는다.
처음엔 취향을 하나 둘 내려놓는다는 것이 일상을 볼품없고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돈을 절약하고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에서 작성된, 일상의 목적을 암기하기 위한 일종의 복무신조服務信條를 복창하고 이행하는 현역병같은 삶이 재미있어 보일 리 만무하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취향을 없애보니 취향이 없는 것 그 자체가 나름의 취향이 되었음에, 모순적이게도 이제 나의 취향은 '없음'이로다. 취향없음의 취향을 바탕으로 새로운 취향을 쉬이 들이지 않으며 있는 것마저 걷어내는 삶을 살아보니 심신이 가볍고 본질만을 챙겨가고 있음을 알겠다. 쓸데없이 부피만 차지하는 부산스러운 취향이 들어설 곳 없이 일상을 진공포장하면 삶은 알맹이만 남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비우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좋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만을 이행하는 가운데 틈을 마련하여 책이라도 한 장 더 보고 턱걸이라도 한 번 더 하려고 노력하게 되므로 단출한 삶은 오히려 밀도가 높고 깊이 또한 깊으며, 이와 같이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하다 보면 무거웠던 머리는 점점 가벼워지고 탁했던 시야는 점차 맑아지므로 좋고 나쁨이 간단히 구별되고 경중輕重의 저울질이 빠르고 쉬워진다. 또한, 취향이 없음으로 인하여 일상의 모든 선택들은 마음에 쏙 드는 것까진 아닐지라도 마음에 안 드는 것 또한 아니게 되는 느슨한 중립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헐겁고도 여유로운 마음상태는 나로 하여금 모든 선택지들이 무난하게 느껴지게 하고, 종국에는 자연스레 나의 일상 전체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준다. 요란하고 대단한 취향이 없으니 '아무 거나'라는 것이 생으로 구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치장물과 장식품을 모조리 걷어낸 검소한 삶은 복수정답을 쉽게 인정케 하여 삶의 만족도 점수를 높여준다. 아래의 항목들은 내가 내 멋대로 인정한 나만의 복수정답지들을 나열해 본 것이다.
패션취향은 없다. 유행을 따라가기엔 크고 작은 품이 드니 아예 유행을 비껴가는 쪽을 택한다. 내가 입고 다니는 옷들을 주욱 나열해 보면 몇 장 되지 않을 것인데, 그마저도 대부분 무채색 혹은 민무늬와 같은 지독한 무난함으로 점철된 것들이다. 요즘은 Y2K가 유행이니 레트로가 대세니 하는 모양인데, 나로서는 물건 자체가 가진 진정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쓰고 또 쓰는 고루한 소비행태를 고집하는 터라, 바짓가랑이에 빵구가 나고 신발의 뒷창과 안창이 닳고 해질 때쯤이면 그간의 몇몇 유행들은 계절처럼 지나가고 없을 것이다. 패션이나 유행 같은 것은 얼마 가지 않아 필시 바뀐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유행의 한두 가지 속성 정도만을 알뜰히 챙기는 태도는 시대를 영리하게 즐기는 지혜로운 자세라고 봄직하나, 사라질 것이 명백한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챙겨나가는 삶의 태도는 무의미하며 되려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티셔츠와 운동화 말고도 챙길 것은 산더미다. 일상이 지하철이고 내가 기관사라면, 패션의 최전방인 홍대입구역이나 한강진역에선 정차하지 않는다. 출근과 퇴근과 가끔씩의 가족 나들이만을 반복하는 내가 홍대나 한남동을 갈 일은 없다. 그곳 말고도 정차해야 할 역이 수백이 넘는다.
머리를 아주 짧게 스포츠로 깎은지 3개월 정도 되었다. 다운펌을 하고 가르마펌을 하고 등등 여기저기를 지지고 볶기만을 십수 년이고 머리카락에 안 해 본 짓 없이 별 짓을 다 해봤지만 한 달만 지나도 흐지부지되어 부스스한 머리가 되기 십상인데, 그냥 스포츠로 바짝 쳐올리는 것이 마음 편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젠 정말 아저씨가 다 되었다. 아저씨가 되어보니 아저씨들의 마음을 알겠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왜 그렇게 머리 좀 짧게 깎고 다니라고 했던 것인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생각해 보면 요리조리 멋 부릴 시기는 이제 지나지 않았는가. 헤어스타일로 나를 정의 내리는 사춘기와 이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 온 신경을 동원하는 총각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아침엔 출근으로 허덕이고 저녁엔 육아에 바빠 죽겠는데 한갓지게 드라이기와 롤빗을 쥐고서 머리카락을 주물럭댈 시간 따위는 없다. 이 말을 아내에게 해주었더니, 아내 말로는 여자들도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긴 머리를 치덕치덕 감고서 또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말리는 그 시간이 아깝고 또 너무 귀찮아서 그런 과정은 1초라도 빨리 해치우고 차라리 집안일을 하든 누워서 쉬든 다른 걸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고 여자고 나이가 들면 생각하는 방식과 추구하는 바가 비슷해지나 본데, 이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아파트 상가 미용실에서 16,000원을 주고 바짝 컷트를 쳐올리는데, 그렇게 하면 대략 5주 정도를 버틴다. 스포츠 머리라는 것이 대단한 구성과 설계를 기반으로 하는 헤어스타일은 아니지만서도 나의 기대 이상으로 머리를 잘 깎아주어서 계속 해당 미용실을 다니는 중인데, 길 건너편 아파트 상가에 7,000원짜리 이발소가 있다는 것을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요즘 나는 그곳을 눈독 들이고 있다.
커피를 사 마시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쓰기 아까운 돈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기지 않아 급하게 우산을 살 때 쓰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커피를 사 마실 때 쓰는 돈이다. 커피는 어떤 원두를 쓰는지, 그 원두를 얼마나 볶고 어떻게 갈아놓는지, 물의 온도는 몇 도인지, 물은 어떻게 붓는지 등등에 따라 맛이 다 다르다고 하는데, 나의 싸구려 미각은 커피맛을 놓고서 대단한 규모의 범주화를 시도하거나 이런저런 풍미의 계통을 세울 만큼의 능력이 없는 관계로, 나에겐 이 커피나 저 커피나 그 맛의 차이가 거기서 거기다. 또한 맛도 맛이지만 커피는 (특히 일터에서 마시는 커피는) 혼곤한 정신을 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즉 카페인 섭취를 목적으로 마실 때가 많다. 그 개규開竅의 성질은 500원짜리 커피나 7,000원짜리 커피나 매한가지다. 테이스터스 초이스라는 동결건조 알맹이 커피가 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집에서 자주 드시던, 출시된 지 아주 오래된 커피인데, 쿠팡엘 들어가 보면 500g짜리 한 봉지를 대략 15,000원 정도 주고 살 수가 있다. 그러면 동결건조된 커피 알갱이가 잔뜩 오는데, 그걸 한 숟갈씩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면 커피가 무한으로 끝도 없이 복사되며 먹어도 먹어도 커피 알갱이가 줄지를 않는다. 맛도 약간의 산미가 있어 꽤 괜찮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게 되니 밖에서 파는 커피의 원가가 얼마나 저렴한지 알겠으며, 컵과 뚜껑과 커피추출액과 뜨거운 물과 인건비와 상가임대료를 다 합쳐도 몇 백원인 것을 몇 천 원씩 주고 사 먹는 것은 수지타산이 전혀 들어맞지 않으니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할 짓이 못 되는 것이다. 나는 단 음료를 좋아하지 않아서 언제나 블랙커피를 마실 뿐인데, 이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 마실 수 있으므로 더욱이 카페를 찾아다닐 일이 없다. 나에게는 카페라떼니 마끼야또니 콜드브루니 블렌디드니 전부 필요 없이 직접 숟가락으로 타 먹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뿐이며, 스타벅스의 전 메뉴를 들이대도 테이스터스 초이스만 못하다. 이러한 커피철학으로 그간 아낀 커피값이 꽤 될 것인데, 나는 이것을 혼자 남몰래 차고 다니는 작은 훈장처럼 매우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믹스커피는 아무리 저렴하고 간편하다 해도 그 높은 당분이 뿜어내는 달짝지근함과 끈적거림이 싫고 부담스러워서 입에 대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담배가 2,500원이던 시절, 그것은 큰 부담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구름과자라는 이명에 걸맞은 군것질의 대상이었다. 나 또한 대학생 때와 취준생 때, 그때 그 시절의 가벼움과 치기어림을 바탕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담배들을 객기로 피워댔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환기하는 데에는 담배만한 것이 없으므로, 그 간편한 효용을 위해 오랜 기간 여기저기서 시도때도 없이 끽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담배값이 4,500원씩이나 하는 마당에 아내가 있고 아이마저 있으니,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담배는 언감생심이다. 담배를 피울 시기는 이제 지났다는 것이다.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거니와, 4,500원을 내고 담배를 사서 피우는 것은 말 그대로 지폐를 돌돌 말아 입에 물고서는 불을 붙여 태워서 공중으로 날려 없애는 꼴이다. 4,500원이면 아내에게 비싼 프랜차이즈 커피 한 잔 정도는 사 줄 수 있으며, 아들이 먹는 분유 몇 숟갈 분량은 될 것이다. 담배는 허세와 정서불안과 의지박약의 상징일 뿐이다. 기호식품이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한 어휘 공작工作, 꼴에 식품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꼴사나운 시도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담배는 식품이 아니라 담배이고, 따라서 담배는 마트 식품코너에 있지 않고 담배매대에 있을 뿐이니 담배 따위를 먹는 식품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담배를 피우게 되면 피우는 사람은 그 연기를 몸 안으로 전부 꿀떡 삼키지 못하고 입 밖으로 뱉어낼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사실 흡연은 흡연吸煙이 아니라 배연排煙이라고 해야 그 민폐의 속성이 정확히 표현된다. 깨끗하지도 않을 그 배연자의 구강과 콧구멍을 오갔던 지저분한 배기가스를 들이마시는 옆사람의 입장은 참으로 난처하고 곤욕스럽기 그지없다. 부엌의 작은 창을 열고 아기 젖병을 설거지하고 있으면 밖에서 한 번씩 담배냄새가 들어오는데, 그 니코틴과 타르와 벤젠을 머금은 담배 연기가 기껏 씻어놓은 아기 젖병에 들어붙는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내가 그간 피웠던 담배연기도 누군가의 젖병에 수도 없이 달라붙었으리라. 건강도 건강이지만 담배 따위에 태워먹는 그 돈이 헛되고, 아이에게 향하는 그 백마白魔같은 연기를 생각하면 담배는 그야말로 백악무익하다. 여기저기 버려져서 하수구를 틀어막는 꽁초와 온동네 바닥을 축축하게 만드는 누런 가래침까지 여기에서 언급하진 않겠다. 이제 나는 가끔씩 꿈에서나 담배를 피우곤 할 뿐이다. 꿈에서 깬 후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나의 흡연의 역사와 배연의 전과前科를 뒤로 한 채 담배의 척결과 타도를 위해 앞장선다.
즐겨하는 스포츠레저는 없다. 골프는 그 장비값과 그린피와 캐디피 등등 온갖 종류의 명세서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고, 요즘 많이들 친다는 테니스도 알아보니 비용이 만만찮다. 다들 어떻게 그리 값비싼 공놀이를 쉬이 하는지 의문스러움을 넘어 때때로 부럽기도 하다. 또한, 돈도 돈이거니와 골프와 테니스는 한 번 하러 갔다 하면 몇 시간이고를 공 치는 것에 몽땅 할애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나로서는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골프나 테니스는 나에겐 마치 승마와도 같아서, 값비싼 상류층의 교양 넘치는 놀이문화로 다가올 뿐임에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쇳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헬스장이 그나마 저렴하고 가성비가 있는데, 아기가 생기고 나니 헬스장에 갈 시간조차 아깝다. 아기를 보는 아내를 놔두고서 나 혼자 헬스장엘 찾아가 혼자만의 시간을 구가한다는 것이 더없이 욕심 같아서, 이제는 그냥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동네 언덕길을 뜀박질한다. 페어플레이나 올림픽정신 같은 상위 개념이 들어설 여유공간은 없다. 고풍스럽고 쾌적한 여가생활이 아닌, 군살이 몸에 들러붙는 것을 최대한 막아내는 정도의, 건강과 허리둘레를 위한 숙제와도 같은 생활체육만으로 나는 자족한다. 이것을 해내는 것만도 쉽지 않다.
취향을 싣지 않는 삶은 에두름 없이 목표를 향해 곧장 날아간다. 가족의 곳간을 채우는 게 급선무다. 당장의 일상을 공산품처럼 규격화해야 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고풍스러운 수공예품이나 값비싼 사치품을 골라 삶을 채우는 것은 나중 일이다. 원하는 미래를 향해 일상을 운항運航할 때에는 모든 개인 취향을 덜어내고, 모든 것을 최소한도로 유지해야 한다. 무거운 수화물과 불필요한 장비는 모두 덜어내고 초경량으로 운항한다. 그래야 중요한 것들만을 겨우 싣고서 멀리 날아갈 수 있다. 필드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거나 담배를 사서 피워댄다면, 그래서 그것들이 일상의 자리를 차지해버린다면, 나는 아내와의 저녁시간과 아들의 내복 몇 벌을 반대급부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고 철 지난 것들은 모두 비행기 밖으로 던져버려야 하는데, 아내의 것을 버릴 수는 없고 아들의 것은 더더욱 버릴 수 없으니 나는 나의 것을 가장 먼저 버린다. 유행을 버린다. 파마머리를 버린다. 커피와 군것질을 버린다. 담배를 버린다. 테니스라켓을 버린다. 불필요한 술자리를 버린다. 불편한 인간관계를 버린다. 쓸데없는 애사심과 과잉충성을 버린다. 승진욕심을 버린다. 못 해본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탐망을 버린다. 그렇게 맘속을 차지하는 욕심과 사치와 감정 일체를 비행기 바깥으로 전부 가차 없이 내던진다. 이렇게 나는 나를 버림으로써 내가 되어야만 하는 내가 된다. 나의 것을 내던짐에 미련을 가지지 말 것이며, 나는 이를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워하려 한다. 나는 내가 원체 무미건조 무색무취의 사람이라 이것이 생각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며, 맹탕으로 심심한 나의 성향이 이제는 고맙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아들과 책 몇 권과 국산맥주 몇 캔이면 충분히 멀리 날아갈 수 있다. 만약 맥주마저 버려야 할 때가 온다면···. 그마저도 가차 없이 밖으로 내던져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실로 고통스럽겠으나 나는 각오하고 있다. 오늘의 시간선과 현실의 국경선을 넘어, 나의 가족이 보다 나은 미래의 신대륙에 당도할 그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