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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선비 Sep 26. 2024

퇴근과 출근 사이에  소맥의 황하黃河는 흐른다

  잠이 오질 않는다.


  설렘에 잠 못 이루던 때는 과연 언제였던가. 밤이 깊어 잠자리에 누우면 걱정과 고뇌와 권태가 정신을 짓눌러서 숨이 막힌다. 제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음에 에라 모르겠다 그냥 침대에서 일어난다. 잠이 오게 할 용도로 최대한 재미없는 책을 책장에서 골라 몇 장 들추어보다가, 책도 이내 덮어버리고선 냉장고를 열어 맥주캔을 딴다. 늦은 밤에 소주는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다.


  칙-딸깍. 맥주캔을 따는 짧고 경쾌한 소리에는 모호함이 없고, 한 번 따버린 캔은 도로 닫을 수 없어 망설임이 없다. 맥주는 그 단순성과 저돌성으로 하여금 들이켜기 전부터 벌써 마음을 시원하게 적신다. 맥주는 홀짝이는 술이 아니다. 맥주는 자동차에 기름을 채워넣듯 단번에 목구멍이 터져라 때려박는 술이다. 주유량은 가득이다. 사래가 들리기 직전까지 맥주를 최대한으로 들이붓고서, 목젖까지 차오른 맥주에 컥컥대며 겨우 숨을 내쉰다······. 언제부턴가 술에 너무 많이 기대어 살고 있는 듯하다. 뻑적지근한 생각이 트이게 하고 갑갑한 마음을 열어젖힐 마중물로서 몸 안에 각종 술들을 흘려보낸다. 그렇게 메마른 심상이 술로 적셔지고 긴장이 풀려 틈을 보이면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의 불콰한 안쪽에서 보이는 것들을 기억으로 어지러이 필사筆寫해놓았다가 지금과 같은 졸문들로 한 번씩 옮겨놓는다.


  이 밤이 지나면 또 출근이다. 오늘 저녁이 가는 것이 아쉽고 내일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운데 흘러가는 시간은 잠시라도 붙들어 맬 수가 없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냉장고를 뒤져서 남은 술병을 까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묶여 있으면 출근이라는 톱날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으니 술을 마셔서 정신을 국소마취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싸구려 술독 안에서 나 홀로 자맥질을 하며 스스로를 마비시켜야 내일을 맞아내는 정신의 고통이 조금은 덜하고, 그렇게 매일같이 마시는 술로 인해 배는 튀어나오고 얼굴은 초췌해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매일을 버틸 수가 없으니 몸이 망가지는 걸 보면서도 밤마다 술을 꺼낸다. 술에 취하면 넘어지고 쓸려도 아픔이 덜하다.


  잠에 들면, 잠든 순간에도 어느새 회사인데,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회사 사람들이고 꿈을 이루는 내용들도 일하는 내용들이다. 깨어 있을 때도 회사인데, 잠든 순간에도 회사인 것이다. 깨어도 회사이고 잠들어도 회사이니 잠을 자도 쉰 것 같지가 않다. 나와 같은 날 같은 부서에 발령받은 같은 팀 형님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 형님도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그 형님은 매일 밤 나보다 더 많은 술을 마신다고 했다. 도망칠 곳이 없으니 술독에라도 숨는 것이다.


  쉬는 날에도 출근하지 않으면 쌓여있는 일거리에 압사당한다. 죽지 않기 위해 일하고 있는데 일로 인해 죽을 것만 같으니, 해도 죽겠고 안 해도 죽겠는 이놈의 일이란 것은 도대체 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말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눈알은 빠질 것 같고 골통은 깨질 것 같고 가슴은 턱턱 막힌다. 직장에서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직장에서의 행복이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비문이며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을 묶어놓는 짓이다. 직장에서 왜 행복해지려 하는가. 그것은 얼음을 쌓아놓고 모닥불을 피우려 하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매일 마시는 술이 깨지 않고 1년 내내 몽롱했으면 싶다. 취하면 못난 세상이 좀 나아 보인다. 취해서 이 직장도 조금이나마 나아 보였으면 싶다.


  이렇게 오늘도 힘겹게 버텨냈는데, 술을 좀 마실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회사에서 온종일 갈리고 쓸리고 찍히고 뜯겨 이미 누더기가 되었으니, 술을 마셔서 조금 더 망가지더라도 달라질 것 없다. 그리고 난 오늘 일터에서 고난과 수난과 핍박과 압박에도 무엇 하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거라곤 결국 나 하나뿐이니, 오늘 하루 나를 술로 망가뜨릴 권리 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를 술로 때리고 내가 나에게 술로 두들겨 맞는 말 같지도 않은 자학의 술잔을 연거푸 들이켜면,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고 마음이 쾌활해지는 모순적이고도 기이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이러한 폭음의 정서와 만취의 정경에 기대어 그날 하루의 울분을 가라앉히고 답답함을 달랜다. 물론 다음날 아침 숙취로 초주검이 된다는 것을 몸소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걸 익히 알고서도 기어코 술을 부어대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며칠간은 초록색만 보아도 소주병이 연상되어 욕지기가 일고, 더 이상 술을 마시면 내가 성을 갈고 사람도 아니라고 다짐하지만, 며칠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술병을 까고 앉았다. 성을 몇 번을 갈았는지 이미 나는 족보도 없는 쌍놈이 다 되었으며, 사람됨을 포기한 지는 벌써 아득히 오래된 일인바, 지금 술 취한 천한 짐승이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다 쓰고 앉았으니 이걸 읽는 그대 입장에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보람과 성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 자체에서 보람과 성취를 찾는다는 사람은 일과 적성의 아귀가 서로 딱 들어맞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거나 치료할 길 없는 중증의 정신질환자이거나 둘 중 하나다. 이것은 그냥 돈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돈이라도 많이 벌면 모르겠으나 버는 돈도 변변찮으니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며 누구 좋자고 이러고 있는 것인가. 책상 위에 놓인 시커먼 유선전화가 울리면 그것은 불가피하다. 업무상 울리는 그 전화는 안 받을 수가 없이 수신이 강제된 절대의무의 전화다. 070으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를 씹어버리듯이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들고, 그러면 그 수화기 안에서는 온갖 문의사항과 요구사항과 불만과 항의와 재촉과 고성과 문책이 물처럼 쏟아진다. 수화기는 샤워기가 되어 부정하고 불유쾌한 말들로 나를 흠뻑 적시고, 그렇게 연이은 전화 수십 통으로 축축해진 나는 젖은 몰골과 궁벽한 마음상태가 되어 끊었던 담배가 절실해진다. 월급엔 욕값이 포함되어 있다지만, 고작 이 월급에 욕값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면 욕값은 대체 얼마로 책정된 것인가. 몇 백 원? 몇 천 원? 이렇게 값이 싸다면 나는 욕을 먹어도 싼 존재라는 것인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서조차 이루기 어려운 꿈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늘의 이 짓거리를 내일도 내년도 반복하자니 스스로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가 된 것이라면 차라리 낫겠으나, 나는 다람쥐가 돌리는 쳇바퀴가 된 느낌이다. 온종일 빙글빙글, 다람쥐에게 짓밟히며 제자리에서 돌아간다. 온몸에서 삐그덕대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다람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돌린다. 빙글빙글, 삐그덕삐그덕···. 어지럽고 목이 마르니 오늘도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려거든 몇 천 원이라도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필요하거든 집 밖엘 나가 일을 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게 힘들어서 술을 마시는데 그 술을 마련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 먹고 먹히는 관계 사이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해서 이따금 돈에도 잡아먹히고 이따금 술에도 잡아먹힌다. 해외맥주 4캔은 원래 만 원이었는데 어느샌가 만 이천 원을 받는다. 고작 이천 원 오른 거라 생각되어도 따지고 보면 20%나 되는 폭력적인 인상률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했던 버드와이저와 칭다오와 산미구엘을 집어들지 못하고 카스 패트병 또는 진로 소주를 집어든다. 안주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계란 혹은 스팸을 구워 먹는다. 돈이 아까워 싸구려 술을 사 와놓고서는 비싼 안주를 배달시키는 짓은 앞뒤가 맞지 않는 짓이다. 돈을 아끼려는 각오로 사 온 값싼 술은 그에 맞는 싸구려 안주를 먹어야 어울리므로, 그렇게 앞과 뒤의 싸구려가 정연하도록 술과 안주의 격식과 논리를 맞춘다. 술을 맛으로 먹는 낭만주의와 탐미주의는 내 안에서 그 시대를 다했다. 술은 그저 기분 좋게 취하기 위해 먹거나 기분이 나빠서 취하기 위해 먹는데, 이 말인즉슨 언제부턴가 술은 내게 지극히 실용주의적이며 목적이 다분한 주취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것이 딱히 좋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러하되, 이렇게 되어버린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연민과 함께, 어른의 세계를 술로 맛보며 나의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의 그때 그 심정을 가늠해 보는 재미와 의미는 있다. 취하려고 마시는 값싼 술은 맛이 좋고 향이 빼어난 일품주는 아닐지라도 그 술만의 궁상맞은 맛이 있다. 나의 아버지도 분명 내가 마시는 술과 똑같은 맛의 술을 많이 드셨을 것이다.


싸구려 술상에 정갈함과 반듯함은 불요하다. 되는 대로 끓이고 있는 대로 꺼내서 차가운 술과 함께 먹으면 단내 나도록 뛰어다녔던 하루가 마무리된다.


  출근을 하는 순간부터 퇴근만을 바라본다. 퇴근이라는 것은 집으로 가겠다는 말인데, 빈손으로의 귀가는 불가하다. 돈을 벌어가야 하질 않는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지엄한 임무이자 지고한 의무이며, 집에 처자식이 있는데 대책도 없이 돈을 벌어가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따라서 집엘 가려면 출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만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퇴근을 하고 싶으면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집에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 것이다. 돈을 벌어가야 한다는 준엄한 삶의 과업은 귀가를 하기 위해 매번 집을 떠나야 한다는 모순을 일상처럼 작동시킨다. 그리고 이 작동 과정의 한가운데에서는 돈을 벌 때 생기는 모든 일들을 견뎌내야 한다. 가축수송이 되어버린 지하철 출퇴근길, 머저리 같은 상사의 멍청한 지시, 쏟아지는 일거리, 수준 낮은 사내문화, 알량한 정치질과 치졸한 수싸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술자리, 사회생활 혹은 센스라는 단어로 포장된 같잖은 아부와 수가 빤히 보이는 언동과 그걸 또 은근히 기대해 마지않는 시선들···. 이 모든 걸 통과해내야 비로소 퇴근이 가능하다. 퇴근 후 기다리는 건 다시 출근이다. 그 퇴근과 출근 사이의 짧은 밤시간에 그토록 맘속에 사무치던 가족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인데, 그 달콤하고 평안한 시간을 잠깐 맛보면 금방 아침이 오고, 아쉬움과 혼란함을 뒤로 한 채 다시 출근의 첫 단계인 북새통 지하철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돈의 멍에를 지고서 똑같은 출퇴근길을 매일같이 돌고 도는 끝 간 데 없는 생업의 쟁기질은 일체중생이 견뎌야 하는 별 수 없는 운명이다.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구내식당에서 틈틈이 갓난쟁이 아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본다. 아들이 침을 흘리며 장난감을 물어뜯는 모습을 본다. 그런 아기를 안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머리는 차가워지고 낯짝은 두꺼워지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나 따위의 자아성취가 다 무엇이냐. 내 가족이 내가 번 돈으로 잘 먹고 잘 입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되는 것이다. 날 선 자존심 같은 건 칼집으로 도로 집어넣자.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개똥밭에도 구르는 것이며 원수의 가랑이 사이도 기어가는 것이다. 가족은, 특히 자식은 그 모든 걸 견디게 해 준다. 회사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회사에 모여 회사일을 한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며,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다 힘겹고 지칠 때면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신다. 일을 마치고 퇴근한 수많은 이들이 마시는 소주와 맥주는 섞여서 황하黃河를 이루고, 출근과 일이라는 험산준령 앞에서 강처럼 흐른다. 이것은 봉급쟁이 장삼이사들이 그리는 도시 산수화山水畫다.


  이와 같은 넘치는 말들을 아내에게 하고 싶다가도, 설명하려면 말이 너무 길어지고 또 아내도 아내만의 고충을 이겨내고 있을 것이기에, 입 밖으로 전부 넋두리하지 않고 대부분을 입 안에 머금고서는 술 몇 잔과 함께 뱃속으로 전부 털어 넘긴다. 삼킨 말들로 불러온 배를 두들기며 다 비운 술병이 아쉬워 입맛을 다신다. 아무튼 퇴근이 최고다. 퇴근만이 살길이다. 퇴근 후 세상만이 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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