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자궁이 없어 애석할 따름이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하다. 출산은 남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아내 단독의 과업이며, 남편이 아내에게 진 일평생의 빚이다.
아내는 죽기 살기로 아기를 품어왔는데, 이제는 죽을 각오로 아기를 낳아야 했다. 출산일이 임박하였을 때, 의사는 아기의 머리둘레가 평균치 이상이라 자연분만을 권하지 않으며 응급제왕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아기는 아쉽게도 머리크기는 부계유전을 택했다. 아기 머리크기가 나의 대갈통을 닮았던 것이다. 임신기간 내내 나는 아내에게 별 도움이 되질 못하였는데, 머리크기도 그중 하나였다.
아내는 배꼽 아래에 날붙이가 들어서는 것을 기꺼이 수용했다. 제왕절개인 이상 남편이 수술을 참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나중에 아내가 수술 과정을 알려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었다. 7겹의 살과 근육과 장기를 수술용 칼붙이가 차례로 갈라낸다. 회복과 미용을 위해 절개 부분의 크기는 최소화한다. 그 10cm 남짓의 작은 구멍으로 아기를 끄집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의사가 절개부위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아기의 팔다리와 몸통과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꾸역꾸역 배 밖으로 꺼내는데, 뱃가죽이 절개부위를 따라 양옆구리까지 찢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아기가 배밖으로 나오면 그 후로는 장기협착을 주의해야 한다. 겹겹이 배를 찢고 또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휘젓기까지 했으니 회복 과정에서 붙어선 안 될 것들끼리 붙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각오로는 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나는 아기를 가지는 것에 있어 대체 무슨 각오를 하였던가.
수술실 바깥 대기실에서 나는 하염없이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아기가 태어나는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는데, 나는 그것이 내 아기의 울음소리인지 구별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기다린 끝에 간호사가 나를 찾았다. 2024년 4월 12일 14시 53분. 그 순간은 내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자, 나와 아내가 다시 태어난 순간이다. 바로 그 연월일시를 기준으로 굵고 진한 시간선이 준열하게 그어졌는데, 이제 나와 아내는 그 시간선 건너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간호사가 갓 태어난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담아 보여주었다. 아이의 태어난 때와 몸무게와 키를 나에게 2번 확인시켜 준 후,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기회를 짧게 주었다. 나는 양가 부모님께 보낼 동영상을 정신없이 찍는 동시에, 화면에 담기는 모습이 아닌 아기의 분홍빛 실물을 육안으로 쳐다보려 애썼다.
아기의 모습은 초음파로 봐 왔던 것과 생김새가 달랐다. 아니, 달랐다기보다는, 아기의 실물은 초음파사진이든 상상이든 그 어떤 것과도 같을 수가 없는데, 아기의 존재가 관념의 세계에서 실존의 세계로 이행移行하였기 때문이다. 즉, 임신이 될까라는 의심에서부터 유산하진 않을까라는 걱정을 지나 눈코입은 누굴 닮았을까라는 상상까지, 부모가 대신 그려주는 추상과 불분명함의 관념에 머물러 있던 아기는, 그 누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든 간에 스스로 구체적인 실물을 갖춰가면서 알아서 실존하기 시작한다. 그 이행의 모든 과정을 통과하며 아기는 그 누구도 정확히 그려내지 못한 고유하고 본연한 자신만의 모습을 가지고서 당당히 존재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탯줄이 잘려 엄마와 분절된 아기는 비로소 자존하기 시작하였다. 아기는 이제 나와 아내의 희망 혹은 상상 속 존재가 아니라 눈앞에 놓인 분명한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 틀림없는 현실은 아내의 피가 묻은 담요에 쌓인 채 나의 목전에서 가냘프게 울고 있었다.
양수로 인해 얼굴과 손발이 퉁퉁 불어있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울어대는 것뿐인 작고 붉은 몸뚱이가 제 울음소리에 맞춰 힘없이 흔들거렸다. 뱃속에 있던 녀석이 이 녀석이구나······. 새생명을 마주한 경이로움이 온몸을 휘감았고, 생명 자체에 대한 경외감에 모골이 송연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이 신생한 존재가 나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식은땀이 났다. 이 녀석이 내 아들이구나······. 지금까지 겪었던 이런저런 경험과 사건과 문제 등등의 별의별 것들은 별 것도 아니었다. 자식이 태어났다는 것 - 이것이야말로 경험이고 사건이고 문제였다. 이제부터 본격 인생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나는 갓 태어난 아들이 인큐베이터에 실려 다시 수술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였구나···. 내가 너를 기다려 왔구나···. 너를 마주하려고 긴 세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며 살아왔구나···. 만나서 반갑다···. 와줘서 고맙다···.
이후 산소호흡기를 낀 채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나온,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겨우 붙들어맨 아내를 마주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남편은 아내를 단순한 연애감정의 대상이나 결혼 상대가 아닌, 삶의 진정한 동반자이자 생의 다시없을 구원자이자 고지를 함께 넘는 전우이자 일평생 사랑으로 사역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마취가 풀림에 따라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 옆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마음속 장부에 기재하면서, 죄스러움과 고마움을 담아 아내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고생 많았다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길고도 고된 과정에 대한 감사인사로는 너무나도 얄팍하고 빈약한, 그러나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기에 부득불 건네는 뻔한 인사말과 함께······.
나의 부모님이 나의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생경한 풍경이면서도, 이보다 더 충만한 광경은 없을 것이다. 나를 안았던 아버지는 이제 내 아들을 안아 올린다. 나를 업었던 어머니는 이제 내 아들을 등에 업는다. 한 공간 안에 3대가 모여 있는 것, 아기의 옹알이 하나만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가히 생의 완성이라고도 일컬어볼 만하다. 아기가 웃으면 가족 모두는 따라 웃는데, 이때 인간 존재는 가장 환하게 빛난다. 가족이라는 나무가 새로이 뻗은 새순은 새날의 햇빛을 받아 싱그럽다.
아이의 오종종한 이목구비와 버둥거리는 손발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 무쌍의 크고 단정한 눈매, 고궁의 처마처럼 뻗어 나온 콧대, 이슬 모양으로 굴러 떨어지는 둥근 콧방울, 연못 위 분홍 연꽃처럼 도톰하고 깨끗한 입술, 양 뺨 구석으로 정연히 숨어들어가며 갈무리되는 야무진 입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꼼지락대는 작고 뽀얀 손과 발······. 세상에 아무리 즐거운 술자리가 있고 재미있는 볼거리가 있고 남다른 인간관계가 있다고 하여도, 거실에 아내와 함께 가만히 앉아 버둥거리는 아이를 잠자코 들여다보고 있는 재미만 못하다. 새로운 술을 먹어봤자 그 술이 얼마나 더 맛있을 것이며, 새로운 영화를 봐봤자 그 여운이 얼마나 가겠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봤자 그 관계가 얼마나 색다를 것인가. 세상엔 재미난 것으로 이름난 것들이 많지만, 아마 나로서는 그것들을 내 나름대로 충분히 즐겨왔으리라.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물론 그것대로 충분히 여유롭고 즐거울 수 있겠으나, 여지껏 살아오면서 익히 느꼈던 똑같은 즐거움을 그저 조금씩 다른 형태로써 반복하며 살아갔을 터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하여도, 지금 내 품의 아이와 만날 수 없게 되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게 되는 한 아이가 태어난 시점 이전으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은 인생의 체크포인트이자 세이브 지점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 태산같이 쌓여있으며 후회스러운 일들도 산더미처럼 산적해있지만, 그것들을 이젠 옛 시절 오랜 기억들이 묻힌 고분古墳으로, 비겁했던 역사와 부끄러운 과오를 묻은 봉분으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지난날의 추억들과 떠나간 인연들과 가리지 못한 시시비비들이 묻힌 높고 낮은 능묘陵墓들이 내 마음속 고요한 유적지로 남아있다. 나는 아들이 태어난 시간선을 넘지 못하고 경계선 앞에 서서 시간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그 크고 작은 무덤들을 바라본다.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들에게, 내가 놓친 모든 기회들에게, 내가 상처 준 모든 이들에게, 바로잡기엔 너무 늦었으며 이젠 돌아갈 수 없음을 고한다. 때를 놓쳐 용서가 무망한 사과의 말은 수신할 이가 없어 무렴하다. 나는 무안함을 뒤로 한 채 뒤로 돌아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옆에는 아내가 서 있으며, 품에는 아들이 안겨 있다. 뒤를 자꾸만 돌아보기엔 갈 길이 멀다.
결혼으로 연을 맺은 평생의 반려자와 하나부터 열까지 호흡을 맞추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전에 없던 기쁨이자 다시 없을 행복이다. 삶은 문득 주어지는 것이지만, 삶의 이유는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삶의 이유를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가족을 꾸리는 것은 어쩌면 내가 몰랐던, 그러나 내가 해야만 했던,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해오고 있었던 나의 본능적인 책무이자, 더 나아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삶의 순리 위에 놓여진 나의 존재이유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