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판정, 인공수정 2번과 임신과 유산, 시험관 2번과 임신과 출산. 나와 아내의 이력이다. 집집마다의 계획과 사정은 전부 제각각이고, 아이를 갖기까지의 역사와 내력 또한 저마다 다르다. 나와 아내가 겪었던 길었던 시간과 힘겨운 과정은 이제 와 돌이켜보니 찰나인 듯한데, 그마저도 당시의 기억을 통해 아이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것일 뿐, 나는 나의 이력과 경험만으로 타인의 생각과 힘듦을 미리 재단하지 않으려 한다.
난임병원에 다니더라도 그곳에 마법 같은 대단한 방법이 있어서 안 되던 임신이 갑자기 되는 일은 없다. 결국 병원에서 사용하는 방법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이다. 임신 과정에 개입한 현대의학이 가장 먼저 손대는 곳은 확률의 영역, 그중에서도 경우의 수이다. 인공수정이든 시험관이든 수정이 이루어질 경우의 수를 물리적으로 증가시켜서, 즉 물량공세를 통해 자연스럽게 임신 확률을 높이는 것인데, 이를 위해 여성의 난소에서 배란 1회당 배출되는 난자의 수를 강제적으로 많아지게 하는 약물을 사용한다. 이 말인즉슨 여성의 몸에 인위적으로 과부하를 거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배란될 난자를 이번 달로 당겨오는 무리한 대출이며, 급작스런 주문 폭주로 생산라인을 과열시키는 부담스러운 과잉공정인 셈인데, 몸에 좋을 리가 없다. 과배란 유도를 위해 아내는 각종 약물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였다. 약물을 주입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는데, 방법이 다양하다는 말인즉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의 이곳저곳에다 화학물질을 있는 대로 들이붓는다는 소리였다. 개중 최악은 질정膣錠과 과배란주사였다. 특히, 아내가 스스로 주사기를 집어 자신의 배에 찔러 넣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실로 참혹하였다. 그 주사는 몸을 낫게 하는 주사가 아니라 몸을 망가뜨리는 주사였다. 아내가 배에 주삿바늘을 주저 없이 꽂는 모습은 매우 결연하며, 그것을 대신 맞아줄 수가 없어 바라만 보는 남편의 마음은 비참하다. 과배란주사는 아내의 결연함과 남편의 비참함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그리하여 이 모든 과정을 함축하는 상징성을 띤다. 주사를 놓는 매 순간은 빠짐없이 참담하였다. 아내는 이것을 감내하고 이겨내었으며, 마침내 임신하였다. 이제 겨우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다.
남편이 하는 일은 몸이 무거워지는 아내를 대신해서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이 전부인데, 그것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직접 뱃속에 아이를 품고 키우는 것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그저 한 번씩 밥을 차려주고, 집안일을 최대한 도맡아 하고,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서는 편의점이나 아이스크림 가게에 헐레벌떡 다녀오는 정도가 전부다. 임신의 영역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데, 특히 신체적으로 도맡은 일은 일절 없다. 그래서 역으로 남자가 해야 할 것들은 많다. 아내가 견뎌내는 고통의 발치라도 따라가기 위해선 무엇이든 찾아서 해놓아야 한다. 그것이 집안일이든, 태아보험 가입이든, 작명소 방문이든 말이다. 게으르고 굼뜬 나는 그 역할을 민첩하게 이행하지 못하고 허덕지덕하였다.
임신에 성공하여 본격 임부 생활이 시작된 이후, 그때부터는 또다시 새로운 걱정의 시작이다. 행여나 또다시 유산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모든 것은 진즉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주차週次에 맞게 거침없이 성장한다. 스스로 평생 작동할 심장을 만들어 펌프질하고 머리부터 손발가락까지 뻗어나가는 아기의 모습은 실로 놀랍다. 이처럼 커가는 아기를 위해 엄마는 아기에게 자신의 피와 밥을 나누어준다. 아기는 그것을 탯줄을 통해 그대로 빨아들인다. 아기는 엄마가 주는 것을 골라먹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를 먹고 마신다. 엄마가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면 아이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카페인과 알코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아내는 커피 한 잔의 여유와 맥주 한 잔의 즐거움을 모두 훗날로 유보할 수밖에 없다. 아내 말로는 임신 이후 신기하게도 아예 커피 생각과 맥주 생각이 나지 않게끔 몸과 정신이 변화한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으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것은 남편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아내의 세심한 마음새이자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씩씩한 다짐이었던 듯하다. 철없는 남편의 깨달음은 매번 한 걸음 뒤늦는데, 미리 걸어간 아내의 지혜로운 발자국이 눈앞에 곱게 놓여있다. 뒤늦게나마 아내의 빛나는 자취를 따라 걸어보는 나의 심경은 무참하다.
임부의 육체는 감당 가능한 한계까지, 때로는 그 너머까지 자신의 신체를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인다. 온몸을 있는 대로 내던지는 것이다. 인체의 혈관은 본디 1인용이지만 아기에게 줄 혈액까지 감당해야 하는 임부는 늘어난 혈액량으로 인해 온몸이 붓게 된다. 손발저림과 뼈시림과 고혈압은 물론 임신중독증이나 임당과 같은 크고 작은 증상들까지도 견뎌내야 한다. 개월수가 늘어감에 따라 아내의 온몸은 풍선처럼 서서히 부풀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가 시려워 손에 물 닿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했다. 발과 종아리가 터질 듯이 부어올라 양말과 신발도 신지 못하여, 양말은 시보리를 가위로 모조리 잘라 신었고 신발은 슬리퍼만 겨우 착용 가능했다. 뱃속에 아기가 들어참에 따라 창자는 위로 말려올라가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였고, 동시에 방광은 아래로 짓눌림에 쉴 새 없이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막달이 되자 아내는 살가죽이 늘어나 여기저기에 튼살이 생기고 코끝부터 발끝까지 붓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내는 거울과 사진을 통해 이러한 스스로를 바라보며 못생겨졌다고 씁쓸해하곤 했다. 하지만 그곳엔 겉모습만을 내리훑는 경망한 형용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피로를 온전히 감내하는 아내의 모습에는 예쁘고 못나고 따위의 피상과 외양을 아득히 초월한, 남편인 나로서는 안쓰러움과 미안함과 고마움에 무릎 꿇고 경배해 마지않는 숭고한 아름다움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골육과 적혈로 빚어진 반죽을 시간의 물레와 사랑의 받침대 위에서 아내와 남편이 함께 열 달 동안 조심스럽게 조형해내면 비로소 아기는 태어난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주차에 알맞은 일정한 속도로, 어디 한 곳 파이거나 무너지는 곳 없이 온전하게, 방심하지 말고 신중하게 마지막까지···. 이렇게 피를 붓고 뼈를 갈고 살을 쑤어 빚어낸 아기일진대, 그렇게 공들인 아기가 태어난다면 그 얼마나 소중하고 어여쁠 것이며, 또 품에 안게 된다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자식은 부모에게 실로 예술인 것이다.
임신은 시간이 돌리는 물레 위에서 아내의 희생과 남편의 헌신으로 아기를 소조해내는 10개월간의 도예陶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