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처럼 임신이 안 되던 나와 아내는 난임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어영부영 하다보면 또 금방 한 살을 먹게 될 것이고, 꾸준히 늙어가는 몸뚱이로 인해 임신은 더욱이 요원해질 것이었다. 요즘 청년들이 아무리 결혼을 늦게 하고 아이를 늦게 가진다 해도 인류가 그렇게 된 지는 이제 한 세대가 겨우 지났을 뿐이다. 애석하게도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몸뚱이의 속성은 조선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슬러 구석기 시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시의 몸뚱이는 현대의 범주에 속하려 들지 않으며 과거의 시간대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다. 우리의 원초육신原初肉身은 21세기 인간세의 취업난과 치솟는 집값과 아쉬운 주머니사정으로 인해 혼기婚期를 조금씩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불가피함 따위는 고려해주지 않는다. 뭐가 어찌 됐든 나이 먹고 늙으면 생식기관은 그 구실을 못한다. 인정사정 없는 것이다.
살면서 난임병원에 가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어서 떨떠름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와 아내가 난임을 겪게 될 것이라고는, 난임이 내 삶의 궤도 위에 놓여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 애당초 삶에 궤도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멍청한 것이었다. 정해진 선로 위에서 달리는 기차처럼, 계산된 경로 위에서 공전하는 인공위성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구나···. 난데없이 끊긴 선로에 기차는 탈선하고, 느닷없이 날아온 운석에 얻어맞아 인공위성은 궤도를 이탈한다. 오늘보다 앞서 놓여진, 삶의 예비된 궤도라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궤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앞날은 계산과 예고가 불가하다. 삶은 궤도가 아닌 궤적이다. 사람은 그저 때와 경우에 따라 꺾이고 휘면서 살아온 궤적만을 남길 뿐이다······.
난임병원은 집에서 지하철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아내와 나는 고향이 같은데, 우리의 고향엔 이름 있는 난임병원이 없다. 이러나저러나 역시 서울에 살아야 하는 건가 싶었다. 고향에서 터를 잡았다면 난임병원에 가기 위해 꼼짝없이 지하철로 1시간 반을 넘게 이동하거나 자동차로 꽉 막힌 서울을 외곽에서부터 비집고 들어갔어야 했을 것이다. 이미 난임만으로 힘든 것인데 병원 오가는 길마저 힘들면 힘듦은 곱절이 된다. 병원이 가깝다는 것 하나만큼은 다행이었다.
아아, 난임병원···. 난 그곳이 산부인과와 비슷한 의료기관일 뿐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난임병원은 산부인과와 사뭇 다르며, 그 둘은 수직선상 정반대 지점에 놓여있다. 산부인과에는 기본적으로 상승의 분위기, 이를테면 희망찬 기다림과 전망 가능한 기쁨이 존재한다. 아이를 뱃속에 품은 산모들은 물론, 이미 태어난 첫째와 함께 둘째의 출산을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난임병원은 그렇지 않다. 난임병원은 그 반대인 저 아래쪽에 점잖이 위치해 있다. 난임병원의 공기는 붕 뜨지 않고 잔잔히 하강한다. 난임병원은 기별 없는 임신 소식에 기약 없는 일월년을 반복하는 무력함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겨우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조용히 모인 곳이다. 병원의 직원들도 친절한 태도 그 이상을 넘지 않으며 언동에 조심성이 묻어있다. 이곳은 삼가 차분하고 고요하다. 웃는 사람은 없다.
난임병원은 아기를 위한 곳이면서도 동시에 아기의 존재가 금기된 모순의 공간이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곳이지만 이미 태어난 아기는 환영받지 못한다. 태어난 첫째를 난임병원에 데리고 와서 둘째를 가지기 위한 진료를 기다리는 부부들이 가끔 있었다. 그 어여쁜 첫째들은 병원 안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는데, 그 소리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아이가 만들어내는 그 순백의 소리를 듣는 순간 난임부부의 가슴속에서는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솟구치고 눈에서는 속절없이 눈물이 터져 나온다. 난임부부는 작은 흔들림에도 마음속에 위태롭게 쌓여있던 설움이 와르르 쏟아지곤 하며, 그렇게 무참히 쏟아지는 비애에 온몸을 무더기로 얻어맞게 되면 그저 눈앞의 모든 것을 원망하고만 싶어지게 된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난임부부가 곤두선 신경과 날 선 반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와 아내는 그때의 경험을 통해 가슴으로 안다. 처음 품었던 희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절망으로 바뀌면서 가슴속에 남은 것이라곤 절규와 좌절에 불타고 남은 잿빛의 무력감뿐인 채로 오늘도 병원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 자신들의 진료순서를 기다리는 그들은 울음을 참고 있다. 아내도 그랬다. 그 옆의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당시엔 기어코 아이를 난임병원에 데리고 오는 부부들을 몰상식하다고 치부하였으나, 그들이 일부러 혹은 몰지각하여 그랬던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면구함을 무릅쓰고 부득이 데리고 왔던 것임을, 아이를 맡길 만한 곳을 찾는다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나는 직접 아이를 키워본 후에야 알았다.
요즘 사람들이 아이를 낳길 거부한다는 통계청 자료와 뉴스 보도는 전부 오류이고 오보인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 이렇게 많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겠다는 일념 하에 평일주말 오전오후 할 것 없이 난임병원으로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나긴 진료 대기시간을 피하기 위해 아내는 보통 평일에 새벽같이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번호표를 뽑아들고서 진료를 받은 후에 회사로 출근했다. 아내가 병원에 갔던 시각은 대게 아침 7시였는데, 아내보다 더 일찍 도착하는 사람들도 꼭 한두 명 있었다. 아내는 그 자체만으로 힘든 출근길을 거꾸로 거슬러 병원에 찾아가 진료를 받은 후, 이미 사람들로 드글거리는 만원 지하철에 뒤늦게 몸을 구겨넣고서 출근 대오에 합류했다. 그만큼 아내는 임신이 간절했고, 간절한 만큼 처절했다. 아내뿐만 아니라 다른 난임여성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임신을 위한 꾸준한 잠자리를 보통 ‘숙제’라 표현한다. 숙제만으로 결판이 나지 않으면 난임병원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난임병원을 다니며 임신에 성공해야지만 비로소 산부인과에 갈 수 있는데, 이것을 ‘졸업’이라 표현한다. 숙제는 끝나질 않고 졸업은 쉽지 않은데 유급은 비일비재하다. 이런 면에서 난임병원은 병원이 아닌 고시 학원이다. 산과産科 진학은 쉽지 않다. 이것은 부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집안의 조상님이 은덕을 베풀든 반도의 삼신할매가 점지를 해주든, 속세를 초월한 상계上界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공수정이든 시험관이든 한 번의 시도만으로 결실을 맺는다면 그것은 실로 천만다행이며, 재수와 삼수만으로 끝난다 해도 만만다행이다. 만일 현대의학의 도움 없이 자연임신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진정 삼대적선三代積善이고 천우신조이다.
병원 근처에는 임신과 산모 건강에 좋다는 추어탕을 파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진료나 시술을 마치고 병원에서 나온 부부들은 추어탕을 먹는다. 나와 아내도 추어탕을 사 먹었다. 임신에 좋다면 가시넝쿨이라도 삼킬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난임부부다. 추어탕 한 그릇에는 그들의 간곡함이 담겨 있다. 다음번엔 분명 될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서 꾸역꾸역 한두 숟갈을 입으로 가져간다. 희망을 한두 숟갈이라도 먹어둬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그렇게 난임병원을 다니며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어느 늦여름날 아내의 뱃속에 아기집이 생겼다. 초음파 화면으로 보더라도 강낭콩 알갱이 하나만큼도 될까말까 정도의, 그렇다면 육안으로는 제대로 분간도 되지 않을 그 작은 공간을 미래의 아이가 미리 마련해 두었다는 사실은 경이로웠다. 우리는 난임병원을 '졸업'하고서 산부인과에도 찾아갔다. 산과 의사는 아내의 뱃속을 초음파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책상으로 돌아와서는 간호사로부터 분홍색 산모수첩을 건네받은 후에 그 첫 페이지에 육필로 “임신을 축하합니다!”라고 적어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검정 펜으로 적힌, 글자 여덟 개와 느낌표 하나로 이루어진 그 문장의 뜻은 분명했다. 아내와 나는 안도감과 설렘에 감격하였다. 찾아온 광명에 마음속 이끼는 사라졌다. 양가 부모님은 우리를 축복하였다. 아내와 나는 아기의 태명을 지었다. 각자 하루하루 임신일기를 쓰며 그 내용을 공유했다. 보건소에서 임산부 뱃지를 받아 아내의 가방에 달았다. 회사 사무실에 임신사실을 전하며 커피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기집은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