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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선비 Aug 08. 2024

일대중사(一大重事), 결혼

  주말에 한 번씩 지인들의 결혼식을 다녀올 때마다 드는 생각은 보통 두 가지인데, 첫째는 '대체 내가 이 어렵고 험난한 과정을 어떻게 통과했단 말인가'라는 점이고, 둘째는 '이토록 어려운 과정을 나는 진즉에 완수하여 별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으니 이보다 다행인 것은 또 없다'라는 점이다.  


  아내와 나는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이어갔다기보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나브로 결혼 일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여 어느새 부부이자 부모로 살고 있다. 결혼 준비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내게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의 실무는 아내가 도맡아 하기도 했거니와(다시금 아내의 추진력과 실행력에 감사하다) 예산을 짜고 식장을 예약하고 예복을 맞추고 사진촬영을 하고 상견례를 하고 사회자를 구하고 청첩장을 돌리고 등등의 이런저런 과정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저 내 머릿속에는 '생전 처음 해보는, 허나 마구잡이로 해서는 안 되는, 결코 쉽지 않은 많은 것들이 우당탕탕 정신없이 지나갔다'라는 정도의 길고 뭉뚱그려진 한 줄의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결혼식 당일 또한 워낙 긴장을 많이 하고 신경 쓸 게 많아 심신이 혼미했던 나머지, 마치 술을 진탕 마셔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과연 결혼이란 무엇인가. 방금 언급한 것처럼 결혼은 그 과정도 지난하지만, 사실 결혼 그 자체의 본질과 양상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결혼에 대한 생각 내지 정의는 개개인마다 전부 제각각일 터인데, 내가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지, 즉 내가 어떤 결혼을 했는지에 대해 적어본다.


  결혼은 혈육관계, 즉 오직 피와 살로써만 작동되는 자연법칙을 인간문명의 제도로 모사模寫하여 그만큼의 강력한 효력을 혈육이 아닌 두 사람의 관계에 부여하는 것이다. 혈액 및 세포 내의 정보를 일절 공유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두 독립 개체가 만나, 직계존비속을 잇는 혈연만큼 그 시뻘겋고 끈적이는 불가절不可絶의 결속을 가족친지와 인우지인 모두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맺는 의식인 것인데, 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마치 섞인 것과 동일한 것처럼 상호 피의 관계를 설정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결혼식 하면 떠오르는 순백의 드레스 또는 반짝이는 샹들리에 같은 것은 사실 떠들썩한 겉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은 낭만 가득한 백년언약이라기보다는 신랑신부가 서로에게 각자의 피를 끼얹는 핏빛 주술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결혼은 법·돈·관습·문화·감정 등등 온갖 종류의 쇠사슬로 서로를 칭칭 동여맨 후, 그것만으로 모자라 아예 그 사슬뭉치를 용접해버리는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친밀함을 위한 육체적 결합뿐만이 아니라, 혼인신고를 통한 법적 융합, 금융계좌 인수합병, 임신과 출산과 육아, 양가兩家의 내력 및 집안의 속사정 공유, 장인장모·시부모·처제·처남·시누이·시동생 등등 새로운 구성원과의 교류, 양가 어르신들의 생신과 어버이날과 명절과 연말연시와 돌잔치 등 각종 경조사 기획 및 참여 등, 크고 작은 수십 가지 형태의 통폐합 및 신설된 의무조항을 잠자코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편의 거대한 세계가 적응할 틈도 없이 통째로 내 옆구리에 떡하니 들러붙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얽힌 결속을 푸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돌이키는 것에는 상당한 대가가 따른다. 결혼이라는 주술의 효력이 상당한 만큼, 그 반대술식인 이혼 또한 결코 쉽게 볼 것이 아니다. 그저 도로아미타불의 수준이 아니라, 살점이 뜯기고 영혼이 패이고 팔다리는 절단날 각오로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융해되어 붙어버린 쇠붙이를 뜯어내려면 망치와 톱날을 들이대는 수밖엔 없으며, 한 몸을 둘로 찢어놓으려면 과다출혈을 감수하며 수술대에 오르는 수밖엔 없으므로.


아내와 종로구 삼청동에서 맞춘 결혼반지. 반지는 단순한 금붙이 장신구가 아닌, 부부됨을 확인하며 서로의 손가락에 채우는 영혼의 구속구이자 기혼임을 외부로 드러내는 혈맹의 표식이다.

  

  문명의 바깥 야생에서는 오직 번식과 쾌락을 위한 암수의 일시적 만남이 있을 뿐이고 다처多妻 다부多妻 역시 일상다반사지만, 인간의 혼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결혼이란 사랑의 초석과 신뢰의 기둥으로 쌓아 만든 제단 앞에서 결뉴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미래 영겁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직 그대 단 한 사람뿐이라는 굳센 피의 맹약이며, 그 시점부터 평생토록 동물적 천성을 거스르면서 바깥세상의 사변·지변과 인간사회의 악다구니판 속에서 가족이라는 불가침의 영적 터전을 기어코 파수해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차대한 일이란 말인가. 개인에게 있어 실로 일대중사一大重事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장황하고도 그럴듯하게 써내려간 나의 혼인서약서를 나는 제대로 이행해오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직 내 아내만이 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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