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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un 04. 2021

Z의 발음을 보여주마

천방지축 여중생이 영어를 사랑하면 생기는 일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 흉내 내기가 제일 쉬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도 이선희 모창을 잘해서 엄마의 학교 방문 한번 없이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선생님의 쇄도하는 요청 때문에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 책상 옆에 서서 반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이선희 히트송 메들리를 한동안 해야 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공부를 하고 싶지도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손님처럼 학교에 가방만 메고 왔다 갔다 하던 어느 날, 사건은 영어 시간에 일어났다.

중학교에 가서 처음 배우게 된 영어. 이국적인 외모와 큰 키의 여순영 영어 선생님은 그날 알파벳을 어떻게 읽는지 알려주셨다. 맨 마지막 ‘Z’의 차례가 왔다.

“이거는 절대 ‘제트’로 발음을 해선 안 돼. ‘(으)즈이~~~’로 해야 한다. 발음해 볼 사람!”

흉내라면 자신 있던 나는 그런 것쯤은 입에 재갈을 물려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같이 공부 못하는 애는 손을 들어도 선생님이 시킬 리 만무했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손을 들고 말았다. 나의 예상을 깨고 선생님이 나를 지목했다.

“그래 김길모 해봐라.”

‘어라? 선생님 저, 저요?’

난 태연한 척하며 자신 있게 턱을 떨어뜨리며 한방에 내뱉었다.

“(으)즈이!”

“와! 잘했제? 자, 길모한테 박수쳐주자!”     


  얼떨떨했다. 공부 못하는 존재감 없는 나를 발표시켜주신 것도 놀라운 일인데 잘했다고 친구들과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다니. 한 번도 겪어 보지 반응에 내 안에서는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파도는 여순영 선생님에게 또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였다. 처음 만난 그 파도로 현기증이 났다.     


  그 후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쉬는 시간엔 내 취미였던 신발장에서 친구들 신발 숨기기를 하다 선생님께 걸려 교무실에 불려 가거나 마룻바닥에 철퍼덕 앉아 칠판지우개로 친구들 발맞추기 놀이나 하고 있었겠지만, 여순영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공부시간이든 노는 시간이든 영어책을 읽고 또 읽었다. 덕분에 시험을 보면 하나 틀리거나 거의 만점을 받았다. 살다 보니 영어가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이 된 것이다. 영어 한 과목에 성취감을 느끼자 다른 과목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나는 ‘영어 잘하는 애’에서 ‘공부 잘하는 애’로 변해갔다.     


  얼마 후 ‘제1회 교내 영어암송대회’가 열렸다. 학년별로 학교에서 정한 영어 교과서 본문을 외우는 것으로 예선도 보는 큰 행사였다. 1학년은 한국인 학생 두 사람이 Mr. Baker와 Mrs. Baker 부부를 서로에게 소개하는 형식의 본문이어서 두 명이 짝을 이루어 대회를 나가야 했다. 여순영 선생님은 다른 반에선 반장과 부반장을 한 조가 되게 짰는데 우리 반만 반장과 아무 감투도 없던 나를 나가게 하셨다. 선생님의 파격적인 결정에 부담도 됐지만, 그것은 곧 하루하루 사는 낙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 반 반장이었던 경진이와 방과 후 교실에서 지치지 않고 매일 연습할 수 있었다. 반장에다가 말도 빠르고 발음도 좋았던 경진이와 여순영 선생님 ‘백’으로 선발된 나로 결성된 우리 팀의 결과는 ‘최우수상’이었다. 이 상으로 난생처음 운동장에서 하는 전교 조회에서 전교생을 뒤로하고 단상에 올라가 교장 선생님께 상장을 받는 경험을 했다. 단상 위 공기는 상쾌하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짜릿했다.      




  여순영 선생님의 마법으로 나는 영어와 사랑에 빠졌고 중학교 시절은 내 삶에 초록의 동그란 숲을 이룬 ‘오아시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영어는 사춘기라는 복병으로 고등학교에선 빛바래긴 했지만 황량한 사막과 같은 삶에서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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