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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ul 07. 2021

My name is Nikita!

오후 6시, 니키타로 변신할 시간!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보러 가던 날을 떠올리면 싸늘한 초겨울 새벽안개에 깨어나지 않은 영혼을 데리고 세상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마음으로 집을 나서던 내가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해낼 거라는 최소한의 확신도 없고, 왜 가야 하는지 이유도 없이 꾸역꾸역 고사장에 가서 온종일 시험을 쳐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전기, 후기 모두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전문대가 남았다. 그중에서 제일 낫다는 평판을 듣고 무엇보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가 있었고, 내 성적으로 그 학교에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실패로 잔뜩 겁을 먹고 고등학교 3년 동안 타고 다닌 버스의 종점에 있던, 집에서 1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지원한 어리석은 나에게 조언해주는 담임 선생님도 그 어떤 어른도 없었다. 그렇게 농담처럼 결정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풍물 동아리에 들어가 1년 동안 공부는 내팽개치고 그 동아리에 푹 빠져버렸다.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 공터나 운동장에서 매일 풍물연습을 했다. 나는 장구가 좋았다. 한때는 장구로 졸업 후 진로를 정하면 어떨까 하고 고민할 정도로 장구가 심각하게 좋았다. 그곳에선 내가 쓸모가 있었고 동아리 내에서는 유능함을 느낄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니 남자 동기들은 하나둘 군대에 갔다. 2학년부터 여자 동기들도 취업에 대비해서 공부하느라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나도 다행히 2학기부터 정신을 차리고 동아리 방보다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내가 펴는 책들은 영어책이었다. 내가 잘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영어였다.     


그러다 영어 관광 통역사에 정신이 팔려 거금을 내고 학원에 등록했다. 여행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 보였고 무엇보다 돈도 많이 벌고 화려하고 모양새가 있어 보이는 직업 같았다. 그러나 강의를 두세 번 정도 들었을까. 학원장이 수강생들의 돈만 챙겨 도망간, 그야말로 뉴스에서 보던 일이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인가’하는 근거 없는 불안함으로 나 자신을 괴롭혔다. 그럴수록 자존감은 맨틀을 향해 꺼져갔다.     






부산 중앙동에는 대한항공이 있었고 여객터미널도 있어서 그 근처에는 크고 작은 여행사들이 많았다. 졸업 후 작은 여행사에 취업했다. 그런 다음 태어나 처음으로 영어 회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남포동 ESS 학원의 한국인 선생님의 기초 회화반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다음 시간까지 영어 이름을 지어오라고 했다. 나는 고민 끝에 ‘NIKITA’라고 지었는데 ‘앨튼 존’의 ‘니키타’라는 노래에서 따왔다. 일단 이름이 강해 보이고 흔하지 않아 좋았으며 내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훗날 ‘니키타’는 러시아 이름임을 알게 되었고 ‘네가 기타냐’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자주 들어야 했다.     


그러다 박봉에 지겨워져 여행사를 그만두고 작은 건설회사 총무과에 취업했다. 그곳에서도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사장의 일가친척 아니면 선후배들이 포진해 있던 그곳엔 체계적인 규율도 없이 사장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 되는 해괴망측한 회사였다. 그 사장이 가장 싫어했던 것은 훌륭하신 사장님이 베푸는 회식에 일개 직원이 불참하는 것과 회식 중간에 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을 한 직원은 그다음 날 바로 해고였다. 한두 달 만에 잘리는 직원이 수두룩했던 그런 회사에서 1년 뒤 내 발로 나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다. 날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당장 그만둘 순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그 회사를 나간다고 하더라도 비참한 상황은 되풀이될 것을 알기에 당분간 참고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래서 영어학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석하지 않고 다녔다. 퇴근 시간이 되어 회사를 나서면 나는 니키타로 변신했다. 건설회사에 들어간 후 다닌 학원은 ‘삼육외국어학원’이었다.     


삼육외국어학원에서는 많은 인연과 신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외국계 페인트 회사의 캐나다 부사장님의 비서였던 Vicky 언니, 내가 짝사랑했던 유머러스한 Butt 오빠, 호텔에서 오래 근무했던 키가 자그마한 Blue 언니, 대학생이 되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강의실에 다방 언니가 배달 오는 커피를 주문해서 교수님께 죽도록 혼났다던 의대생 Charlie 오빠. 우리는 강의실 안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젊음을 만끽하며 영어가 골수에 스미도록 즐겼다.     






그러던 중 내 영어 공부의 ‘귀인’을 만난다. 바로 KBS 라디오 굿모닝 팝스의 ‘오성식’이다. 오성식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겪었던 좌충우돌 영어 공부 경험담들을 들려주며 실수를 두려워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영어로 꿈을 꾸면 자신의 영어 말하기 목표를 거의 이룬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라도 빨리 영어로 꿈을 꾸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정확한 발음에 과장되고 높은 톤의 그의 목소리에는 라디오 전파를 타고 청취자들이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저 멀리 실낱같은 빛을 보며 숨 막히게 달리던 내겐 그는 시원한 탄산수 같은 존재였다.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하던 영어 회화 프로그램이었던 굿모닝 팝스는 한 달에 한 편의 영화를 공부하는데 매일 영화 속 한 문장과 팝송의 실용적인 표현 두 문장으로 알려주는 매달 교재가 발행되는 방송이었다.


나는 일단 5시 50분에 일어나 방송을 테이프에 녹음할 준비를 했다. 아침에 녹음하면서 1차로 공부하고 퇴근 후 영어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2차로 공부했다. 그러면서 오늘 방송에서 배운 표현을 학원에 가서 어떻게 써먹을지 문장을 만들며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학원 수업에선 누가 눈치를 주든지 말든지 열심히 원어민에게 질문하고 내 안의 영어를 뱉어냈다. 집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3차 총복습을 끝내면 그날 영어공부는 끝이났다. 새 테이프로 녹음하지 않고 계속 덮어서 녹음하다 보니 막상 퇴근 시간에 확인해보면 테이프가 늘어나서 녹음이 안 된 경우도 많았고 전 날 과음한 날엔 방송을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조는 날들도 있었다.      


그렇게 1년 동안 굿모닝 팝스와 함께했다. 얼마만큼 늘었는지 객관적 지표에 따라 내 실력을 시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즈음 드디어 영어로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이 건설회사를 퇴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대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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