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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an 31. 2022

유식하고 세련된 깡패 같은 '딸에 대하여'

김혜진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 서평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 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엔 좋은 선생님.
<중략>
그러나 지금 딸애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김혜진 ‘딸에 대하여’ p.69-     

 

  엄마 말대로 잘도 커 주던 어린 시절을 지나 30대에 접어들어 유식하고 세련된 깡패(p.46)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딸아이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엄마와 딸에 관한 이야기인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는 독서 모임의 두 번째 책이다.     

 ‘딸에 대하여’ 속 핵심 인물은 모두 여성으로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동성애자이자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딸 그린, 그녀의 파트너인 레인 그리고 엄마가 요양원에서 돌보는 젠이 주요 인물이다.

  화자인 엄마는 교직 생활 후 남편과 사별하고 여러 직업을 거쳐 요양보호사를 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딸은 경제적인 문제로 자신의 파트너와 엄마 집에 월세로 얹혀살게 된다. 엄마는 딸이 동성애자인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이제는 그 파트너까지 매일 봐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첫 번째는 딸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대학에서 해고된 동료들을 위해 시위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날 엄마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 딸이 그토록 바꾸려고 했던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사건은 젊어서는 세계를 누비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젠이라는 치매 환자가 요양원의 상황 때문에 열악한 치매 전문 병원에 버려지다시피 보내진다. 엄마는 젠이 보내진 치매 전문 병원에서 그녀와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물건들을 쓰레기장에서 챙겨 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젠은 병원이 아닌 엄마와 딸의 집에서 숨을 거둔다.      

  이번 모임에서 회원들이 가장 열기를 띠며 토론한 질문은 바로 ‘어느 날 갑자기 내 딸이 혹은 아들이 동성애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였다. 회원들은 살면서 거의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모두 남의 일이라면,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겠지만 그것이 내 자식과 나의 일이 된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아이의 성향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될 것 같다는 의견이 전반적이었다. 

  만약 내가 엄마에게 동성애자라고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아마 엄마는 그 자리에서 놀라 까무러쳤을 것이다. 그런 다음 욕을 하거나 나를 때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때론 나를 어르고 달래보기도 하지만 나의 단호한 태도에 곧 우울해지고 시간이 가면서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깨닫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처음 충격이 엄마보다 조금 덜할 뿐 내 딸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엄마와 비슷한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다면 엄마는 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울 것이다. 그런 엄마의 딸인 나도 마찬가지다.

  독서 모임 회원 한 분은 내 자식이 동성애자든, 장애인이든, 사회의 차별받는 그 어떤 소수자일지라도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투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투사가 되게 하는 힘은 자식의 삶은 엄마의 삶이라는 모성의 ‘동일시 현상’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설 속 엄마는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먼 성 소수자이자, 타인의 삶을 위해 투쟁까지 불사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수치스러워했다. 또 딸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자 딸과 레인이 비로소 궁금하기 시작했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변화가 생겼으며, 젠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임종을 맞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묻고 또 묻고 지칠 때까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딸애는 내 자식이니까. 끝내는 내가 알고 싶고, 내가 알아야만 한다.
적어도 나는 도망가는 부모이고 싶지 않다.
그런 식으로 회피하고 머뭇거리면서 딸을 잃고 싶지 않다.
<딸에 대하여 p.156>          


 한 인간이라는 우주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은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질문을 멈추고 비난을 선택할 때가 많다.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두 모녀가 꽃길만 걷길 바란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부디 꽃길이든, 흙길이든, 아스팔트 길이든 언제나 두 사람의 길에 ‘질문’이라는 축복이 함께 하길 기도한다. 





사진: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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