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토투’ 주연의 ‘함께 있을 수 있다면’이란 영화에서 그의 곱상한 얼굴에 반해 넷플릭스에 있는 그가 출연한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우울하고 칙칙한 분위기 때문에 지루했다. 내가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시간은 주로 설거지하는 때이므로 지루한 노동을 잊게 하는 흡입력 있고 빠른 전개의 영화가 필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도입은 어둡고 심각해서 설거지의 능률을 떨어뜨렸다. 가차 없이 바로 다른 영화로 넘어갔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네가 다 안 본 영화야!’라며 자꾸 이 영화를 권유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두 번째 이 영화를 봤을 땐 설거지가 끝난 뒤에도 볼 수밖에 없었고 세 번째 이 영화를 봤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으며 주인공들이 자꾸 보고 싶어졌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두 남매의 아버지이자 2년 차 백수에 우울증 환자인 베르트랑이 우연히 수영장에 가서 홀린 듯 남자 수중 발레 팀원을 구하는 광고를 보고 팀에 합류하면서 시작된다. 이 남자 수중 발레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훈련보다 라커룸이나 사우나실에서 수다 떨 때가 더 진지한, 나이는 40대와 50대로 머리카락은 드라이기로 말릴 필요도 없이 성글고 몸매는 출렁이는 뱃살과 수북한 털, 그것을 견디는 가느단 다리가 인상적이다.
팀원들은 베르트랑 외에도 아내가 도망간 분노조절 장애 버럭남 로랑, 파산 직전 사업가 마퀴스, 자아도취 무명 로커이자 학교 급식 노동자 시몽, 수구팀에게 놀림거리인 수영장 관리인 티에리, 4차원의 여린 뚱보(이름이 안 나옴), 불어를 못 하는 스리랑카인 아바니쉬 그리고 노인 요양원 직원이자 바이커를 꿈꾸는 존 이렇게 8명이다. 그들의 코치는 전직 수중발레 선수 이자 알코올 중독자이며 전 남자 친구 스토커인 델핀이다. 한편 같은 수영장엔 델핀과 더불어 전도유망한 2인조 수중발레 선수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입고 휠체어에 앉아 수구팀을 지도하고 있는 아만다가 있다.
물에 누워 다리도 제대로 못 펴는 이들이 어느 날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남자 수중발레 선수권 대회에 나가기로 하는데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들에겐 ‘메달’이 필요하단 것이었다. 프랑스에선 나가는 팀이 이 팀 외에 없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그들은 프랑스 대표팀이 되었다.
대회 준비를 열심히 하던 어느 날 델핀의 스토커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델핀은 두문불출하게 되고 델핀을 대신해서 그녀의 동료인 아만다가 이 팀을 맡게 된다.
아만다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델핀의 오은영 선생님 스타일의 눈높이 훈련으로 이 오합지졸 팀은 노르웨이에 나가서 거짓말처럼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델핀 코치
만약 영화의 줄거리는 미리 알았다면 나는 영화를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울한 중년 아저씨들의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진부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 를르슈’ 감독의 연출력으로 뻔한 이야기는 뻔하지 않은 이야기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뻔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웃겨도 너무 웃기다.
남을 웃기려면 타인의 성대모사를 한다든지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하거나 상대방의 예상을 깨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 감독은 마지막을 택한 것 같다.
처음 코치였던 델핀은 선수들이 자유 훈련을 할 때면 옆에서 나긋나긋 시를 읽어준다. 그러나 아만다 코치는 델핀과 180도 달랐다. 숨넘어가는 허스키한 목소리의 아만다는 등장부터 남달랐는데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다가온 티에리를 뺨을 때리며 주접떨지 말고 제자리에나 가라고 소리치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둔다는 로봇 춤 뚱보를 막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친다.
또 분노남 로랑이 아만다의 고된 훈련과 언어폭력에 못 이겨 휠체어에 앉은 그녀를 수영장으로 밀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로랑은 홧김에 그랬다며 미안하다고 아만다에게 사과하고 그녀도 눈물을 흘리며 벌써 다 잊었으니 사우나에 들어가 푹 쉬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을 사우나에 몰아놓고 아만다는 쇠막대기를 꽂아 문을 잠가버린다. 그런 뒤돌아서며 “두 시간이야! 뚱땡이들아! 두 시간!”이라고 외치고 중지를 날리며 유유히 사라진다.
아만다 코치
영화의 뻔함을 탈피하게 한 또 다른 공신은 음악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40, 50대 아저씨다. 아저씨들의 전성기 시절인 80년대 음악이 영화를 꽉 채우는데 영화의 시작은 영국 그룹 ‘Tears for Fears'의 80년대 히트곡인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가 잠들어 있는 세상을 깨우려는 종달새처럼 울려 퍼진다.
8명의 선수가 델핀과 아만다를 만나 갈등이 해소되고 수중발레에 재미가 붙기 시작함을 보여주기 위해 80년대 세계적인 요정이었던 ‘Olivia Newton-John’의 ‘physical’이 선택되었다. 이 부분은 흡사 이 곡의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이었다. 그 안에는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터에서 수중발레 안무를 익히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장면은 수중 발레라는 낯설고 어색한 취미가 자신들의 삶에 서서히 녹아들어 그들의 당당한 일부분이 되는 과정이 펼쳐지는 이 영화의 백미이다.
노르웨이 세계 선수권 대회 격전의 그날, 가장 중요한 곡이 공개되었다.
안무에 맞는 곡을 선정하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던 터라 대회 당일에 어떤 곡이 울려 퍼질지 몹시 궁금했다. 현란한 조명과 함께 수영장을 채운 그 곡은 바로 1984년 Philip Bailey와 Phil Colins가 부른 ‘Easy Lover’였다. 그 곡 특유의 힘 있는 연주와 대회장 곳곳을 찌르는 청량한 보컬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쉴 새 없이 바뀌는 화려한 조명과 수면 밖의 일사불란한 연기 아래에는 팀을 위해 쉴 새 없이 발버둥 치며 동료의 발에 어깨가 짓눌리기도 하고 정신없이 숨을 참는 아저씨 선수들이 있었다. 갑자기 느리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바뀌자 대형이 네모에서 동그라미로 바뀌는 안무가 마술처럼 펼쳐지며 서로의 팔을 꼭 잡는 이들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그들이 농담처럼 했던 메달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금메달과 함께 프랑스로 온 그들을 맞이한 건 똑같은 일상이었다. 신문의 기사 한 줄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이 그들은 은행에, 수영장에, 가구 판매장에, 공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엔 반짝이는 금메달이 있었다. 그것은 아만다 코치한테 ‘한심한 뚱땡이들’이라는 욕을 들으며 훈련한 땀의 결과요, 가족과 친구들의 수중발레는 멍청한 게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조롱을 견뎌낸 빛나는 열매였다. 같은 장소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어제의 그들이 아니었다.
영화를 다 봤지만, 이 웃기는 아저씨들을 계속 보게 된다. 음악도 매일 듣고 있다. 오늘도 이들이 수영장에서 첨벙첨벙 물장난 치며 쓸데없는 수다를 떨다 아만다 코치한테 배부르게 욕먹고 있을 것만 같다.
당당한 내가 되는 길은 어쩌면 지루한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억지스러운 설정이 아닌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그린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을 지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