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착한 이들은 힘없이 쓰러져가는데 악은 살기등등하게 판치고 하느님은 침묵하시는 것만 같은 상황을 목격한다. 그럴 때마다 과연 신은 어디에 계신지 화가 날 때가 있다.
이 소설에서도 죄 없는 가난하고 연약한 신자들이 죽어갈 때 과연 신은 어디 계신지 왜 침묵만 하고 계시는지 로드리고 신부는 궁금해한다. 나 또한 농민 신자들이 죽어가는 그 순간 과연 하느님은 무엇을 하실지, 어떤 감정을 느끼실지, 과연 그분은 침묵했던 것인지, 나라면 어떠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엔도 슈사쿠가 위대한 작가라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기어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만드는 일본의 관점과 가톨릭 신자 그 양쪽을 치우침 없이 그려냈다는 점이다. 일본 관리는 기독교를 포교하고자 하는 서양 신부들의 이기심 때문에 죄 없는 농민들이 죽어가는 것이고 애초에 일본이라는 나라는 모래알 같은, 늪과 같은 곳이어서 신앙이라는 씨앗이 자랄 수 없다고 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또한, 순교를 선택한 이들의 순진무구한 신에 대한 사랑과 배교와 고해성사를 오가는 버러지 같은 ‘기치지로’와 같은 인간 심연의 묘사는 탁월했다.
‘침묵’으로 내 안에 일어나 많은 질문에 해답은 아직 얻지 못했지만, 내가 그 농민 신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바로 배교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사진 갠지스강 https://inspireyou.tistory.com
두 번째 작품 ‘깊은 강’은 인도로 향하는 단체 여행객들로 시작한다.
아내가 암으로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면서 환생할 테니 자신을 꼭 찾으라는 말을 남기자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된 이소베, 동화작가인 누마다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관조에 위안을 얻었으며, 구관조가 자기 대신 죽었다고 믿는다. 태평양 전쟁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고 살아 돌아온 기구치의 경우, 다른 전우의 시체를 먹고살아 돌아온 자신에 대한 혐오와 희생된 전우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미츠코와 오츠는 대학 시절 미츠코가 오츠를 유혹한 뒤 그를 버린다. 오츠는 그 뒤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갔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인도 바라나시에서 불가촉천민의 시체를 치우며 살고 있다. 미츠코 역시 오츠를 재미 삼아 유혹하고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오츠가 그녀의 삶 깊숙이 자리 잡았고 그를 계속 찾아다닌다. 이 가운데서 바보 같은 오츠와 무척 닮은 이상한 외국인 청년 가스통이 잠시 스친다.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부가 되려는 오츠는 구두시험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계십니다. 유럽의 교회나 채플뿐만 아니라,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신은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오츠의 목소리를 통해 작가는 신을 파격적으로 해석한다.
“신이란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이렇듯 ‘깊은 강’은 일관되게 동양적 전통과 사상으로 기독교와 신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기존 유럽 중심의 기독교관과 충돌한다.
충격적이었다. 오츠가 말한 신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신을 믿고 싶었다. 동화 ‘해님과 바람’에서 강한 바람 앞에서는 더 많은 옷을 입고 힘을 잔뜩 주어 걸어가지만, 해님 앞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가볍게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오츠의 신은 모나고 까칠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하고 질책하는 아버지 같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허물을 감싸주는 따뜻한 엄마 같은 하느님의 모습을 느끼자 가톨릭도 하느님도 가까이 느껴졌다.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변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는 것을 거북하게 만들던 가톨릭의 분위기에서 지금 이대로의 나여도 괜찮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은 내가 죄인임을 자주 깨닫고 있다.
엔도 슈사쿠는 이렇게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일본 문화와 자기 자신에게 맞게 받아들일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서양의 것인 기독교가 일본이나 한국에 와서 그대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솔직함에서 출발한 두 작품 ‘침묵’과 ‘깊은 강’으로 인해 나도 가톨릭 안에서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을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고민하게 되었다.
코로나도 잠잠해지고 다시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있는 ‘나가사키’에 가서 ‘침묵의 비’에 쓰여 있는 문구를 나직하게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