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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Aug 10. 2023

기억이 필요한 곳, 죽미령

달리아 꽃말은 '감사합니다'

  TV에서 한국 전쟁 관련 흑백 자료화면이 나오면 답답해 보이고 지루해서 채널을 돌리곤 했다. 전쟁이나 군대 용어는 외계어였고 다급하게 피난 가는 사람들은 영화 속 등장인물로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 내가 6.25 전쟁 관련된 일을 하게 되다니…….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죽미 고개에는 ‘유엔군 초전 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74년 전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과 미군,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 Task Force Smith’의 죽미령 전투 또는 오산 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오산에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지인의 소개로 기념관에서 해설사로 6년째 일하고 있다. 일을 시작할 당시 6.25 전쟁은커녕 한국사에도 문외한이었다. 국장님께 교육을 들은 후 해설 테스트를 받기 위해선 무조건 외워야 했지만, 재미도 없는 전쟁 이야기를 외우려니 죽을 맛이었다.

  기념관 상설 전시장은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죽미령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설명된 제1전시실과 540명의 부대원 중 신원이 밝혀진 538명의 이름, 사진, 직위를 기록한 제2 동판 추모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해설 시연에 앞서 전시실에 익숙해지고 기념관 측에서 준 자료를 숙지해야 했다.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라는 이름은 보병의 지휘관 찰스 B.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정부의 명령으로 일본에 주둔 중인 미 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보병과 제52 포병대대의 540명이 일본, 부산, 대전 그리고 평택을 거쳐 7월 5일 새벽에 오산 죽미령에 도착했다. 그 어떤 나라의 군대도 세계 최강 미군을 만나면 도망가리라 생각했지만, 북한의 예상치 못한 병력과 전차에 밀려 미군은 6시간 15분 전투 끝에 산발적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것이 제1전시장의 주요 내용이다. 

  제2전시장인 동판 추모 전시장에서 국장님은 540명 중 보병의 지휘관이었던 찰스 B. 스미스(1916-2004) 중령과 포병의 지휘관이었던 밀러 O. 페리 중령(1907-2010) 2명 정도만 설명하라는 말했다. 

  해설은 30분 정도 걸렸다. 시연이 통과되고 업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한국 전쟁에 관해서도,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시연 원고만 달달 외워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려니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때부터 유튜브와 책을 통해 6.25 전쟁과 초반 지연 작전기에 일어난 죽미령 전투를 공부하며 나만의 해설을 만들어 갔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10부작을 봤다. 영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엔 회원국의 6.25 전쟁 당시의 영상을 모아 만든 아주 소중한 자료였다. 무차별 폭격으로 돌무더기로 변한 집터에 홀로 남아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 아이와 널브러진 시체 곁에서 무덤덤하게 주먹밥을 먹던 피난민들의 얼굴은 잊히지 않았다. 

  이윽고 반가운 이름, 죽미령 전투가 나왔다. 영상을 통해 안 사실은 한국 전쟁은 ‘오판의 전쟁’이라는 점이다. 극동 사령관 맥아더는 북한의 전력을 오합지졸이라고 예상했다. 실상 북한은 소련과 중공의 원조에 힘입어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6월 29일 맥아더는 직접 한강 변을 시찰한 뒤 북한의 진행 속도를 지연시킬 병력을 보내줄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이로써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규슈에 있던 미 제24사단 540명이 지연 군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오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은 한 달 안에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8월 15일에는 광복과 통일의 환호성을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김일성은 왜 한 달로 기간을 정했을까. 당시 미군이 배를 타고 한반도에 이르는 시간이 한 달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마치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기습 남침의 이유가 여기 있었다. 

  1950년 7월 5일 굵은 장맛비가 새벽부터 내리는 가운데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는 진지를 구축했다. 오전 7시 30분 전투식량을 먹고 있는 그들의 눈앞에 북한군의 T-34 전차가 나타났다. 8시 16분 첫 포탄이 발사되고 전차가 휩쓸고 가자, 5천 명의 보병이 나타났다. 그들은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팔로군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 병사들이었다는 것을 영상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전투는 끝이 났다. 죽미령 전투에서 전사자는 56명, 포로가 된 이는 89명이었다. 살인적인 습도와 불볕더위의 7월에 포로들은 오산에서 압록강에 있는 포로수용소까지 논에 고인 물을 마시며 500km를 걸어갔다. 그중 40명만이 살아남아 4년 뒤 본국으로 송환됐다. 

  죽미령 전투는 미군의 준비되지 않은 전투였고 처참한 패배였다. 그러나 한 달 후에나 참전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한 미군을 전쟁 발발 10일 후 오산에서 맞닥뜨리자 북한은 충격에 빠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선 재정비를 지시했고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방어전을 대비할 10일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4년 전 부대원들의 인터뷰 자료를 살펴보며 동판 추모 전시실 해설을 보강했다. 그중 세 사람의 사연은 관람객들에게 꼭 알리고 싶었다. 

  월 포드 형제는 아버지가 어릴 적 돌아가셔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형인 랜섬 월포드가 18살, 동생 버질 월포드가 16살이었던 1948년에 하와이에 주둔 중이던 24사단에 동반 입대했다. 그러나 2년 뒤 죽미령 전투에서 형제는 전사한다. 버질 월포드는 최연소 전사자다. 

  잭 굿윈은 입대 전 사탕 공장에서 만난 바이올렛이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잭이 하와이에 있을 때, 일본으로 주둔지가 바뀌었을 때도 그에게 변함없이 편지를 썼다. 잭은 바이올렛에게 참전한다는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죽미령 전투에 참전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고향 신문에서 잭이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접했고 얼마 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포로수용소에서 4년의 세월을 이겨낸 잭은 고향에 돌아와 바이올렛부터 찾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혼을 선택했고 잭과 바이올렛은 다신 헤어지지 않았다. 

   노만 포스네스는 전투 중 오른 손가락을 잃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뒤 자신들이 한 일과 전우들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전우회를 만들었다. 또 전사자를 포함해서 전우들의 소지품도 모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2013년 유엔군 초전 기념관을, 2021년에는 기념관 옆 스미스 평화관과 평화공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     

  6.25 전쟁에 관한 지식도 관심도 없던 신출내기 해설사는 ‘한국 전쟁’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에 푹 빠져버렸다.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던 그들의 이야기에 한 줄 한 줄 밑줄이 그어졌다. 한 어머니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친구이며 어느 여인의 정인이었던,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른 채 전사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젊은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어졌다. 

  오늘은 매달 오는 수원 10 전투 비행단 신병들이 왔다. 해설을 시작하면 사병들의 하품은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동료와 잡담을 하거나 서서 졸다가도 제2 동판 추모 전시실 스미스 부대원들의 이야기에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해설이 끝나고 평화공원을 걸었다. 저 멀리 아까시나무 숲 앞에 자리 잡은 구舊 초전비가 보인다. 전쟁이 끝난 2년 후 1955년 생존한 부대원들이 오산에 와서 540개의 돌로 세운 추모비다. 초전비는 아까시나무 꽃말처럼 ‘위엄’ 있게 공원 놀이터를 내려다본다. 아이들은 흙장난이 시시해지면 미끄럼틀을 신나게 타고 엄마는 아이들을 평화로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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