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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Feb 12. 2024

그 많던 버드나무는 어디 갔을까 1

흥남철수 이야기

승선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23일 오전 11시에 끝났는데 승선 인원은 14,000명이었다. 미군은 피난민을 실으려고 내려놓은 항만 시설과 군수물자 25만 톤에 폭탄을 설치했다. 12월 23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흥남부두를 떠나자, 갑판에 탄 피난민들은 부두가 폭파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배 안은 정적이 흘렀고 몇몇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음 날 12월 25일 아침 중공군 27사단이 흥남을 점령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북한이 동해안에 심어 놓은 수많은 기뢰에도 불구하고 28시간 후 12월 24일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되고 대신 거제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루 선장은 부산에서 서남 방향으로 80km를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3일간의 항해에는 물도 음식도 없었다. 피난민들은 뱃멀미 때문에, 구토에 시달렸고 생리현상은 앉은자리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파도에 움직이면 지하 화물칸의 오물도 파도처럼 출렁였고 위 칸의 오물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갑판 위 사람들은 임시화장실에 산처럼 쌓여 얼어버린 오물 위에 또 볼일을 봐야 했다. 자리가 없어 서 있던 사람들은 추락사를 피하고자 난간에 혁대나 새끼줄을 자기 몸에 메고 잠을 잤다. 갑판의 피난민들은 영하 20도의 추위를, 지하 화물칸의 피난민들은 선박용 기름 냄새와 오물 냄새를 견뎌야 했다.      

  1950년 21살이었던 2등 기관사 멜 스미스 씨는 사흘간 단 한 번도 열 수 없었던 배의 화물칸을 거제도에 정박하고 열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는 피난민들의 반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눈빛을 94세가 된 기관사는 잊지 않고 있다. 오히려 3일 동안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선원들은 아이들에게 김치 1호부터 5호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김치 1호는 서울에 거주하는 손양영 씨고, 김치 5호는 거제도에 있는 장승포 가축병원의 이경필 원장이다) 그리하여 14,005명이 거제도 땅을 밟았다. 귀가 얼어 터지는 영하 30도의 눈보라 치는 흥남에서 탈출했던 피난민들은 거제도에 내려 어안이 벙벙했다.

 1945년 건조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화물을 끌어올리는 크레인을 갖춘 화물선이어서 짐을 싣는 그물에 나무판을 놓고 그 위에 피난민 10명에서 12명을 올린 다음 짐짝처럼 옮겼다. 내려진 사람들은 지하 3층의 맨 밑 화물칸부터 차곡차곡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실으려고 다섯 개의 화물칸을 철제 빔을 이용해 세 층으로 나눴다. 야외의 최상단 갑판은 공간 하나 없이 빽빽하게 피난민을 태웠다. 지하 화물칸의 피난민은 자리를 잡고 꼬박 하루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화물선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 1945년~1993년)가 12월 22일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5시 육군 장교들이 배에 올라타 라루 선장에게 피난민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장은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피난민을 최대한 승선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13명만 더 탈 수 있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과 UN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을 기점으로 전세를 회복하고 북진했다. 그러나 30만에 달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후퇴를 결정하자 의외의 풍경이 펼쳐졌다. 후퇴하는 군인들을 따라 피난민들이 길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흥남부두와 가까웠던 함흥과 흥남 사람들이 부두로 향하는 국군과 연합군을 쫓아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12월 15일부터 미군과 국군 10만 5천여 명의 병력, 1만 7천여 대의 차량, 35만 톤의 군수물자와 탱크가 흥남부두를 통해 철수를 시작했다. 맥아더가 핵무기를 쓴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연합군과 국군이 북진할 때 도움을 주었던 북한 주민 20만여 명은 살기 위해 흥남부두로 몰려들었지만, 미군의 철수 계획에 피난민은 애당초 없었다.

흥남 부두에 모인 피난민들  <나무위키>

 피난민을 외면할 수 없었던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10군단 민사부 고문 현봉학 박사와 해군 군수 참모로 상륙을 담당했던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줄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미군은 피난민과 함께 철수하기로 했다. 흥남 앞바다는 일본에서 온 공격 수송함 6척, 전차 양륙함 81척, 상륙 선거함 11척부터 어민들의 통통배, 목선까지 190여 척의 피난민 수송선으로 뒤덮였다. 

흥남부두에 모인 수송선들 <나무위키>

   마지막으로 화물선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 1945년~1993년)가 12월 22일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5시 육군 장교들이 배에 올라타 라루 선장에게 피난민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장은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피난민을 최대한 승선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13명만 더 탈 수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나무위키>

  1945년 건조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화물을 끌어 올리는 크레인을 갖춘 화물선이어서 짐을 싣는 그물에 나무판을 놓고 그 위에 피난민 10명에서 12명을 올린 다음 짐짝처럼 옮겼다. 내려진 사람들은 지하 3층의 맨 밑 화물칸부터 차곡차곡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실으려고 다섯 개의 화물칸을 철제 빔을 이용해 세 층으로 나눴다. 야외의 최상단 갑판은 공간 하나 없이 빽빽하게 피난민을 태웠다. 지하 화물칸의 피난민은 자리를 잡고 꼬박 하루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크레인으로 피난민을 실어 나르는 모습 <KBS 다큐 1950년 흥남철수의 비밀 1부>
지하 화물칸의 피난민은 자리를 잡고 꼬박 하루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 KBS 다큐 1950년 흥남철수의 비밀 1부>

  

  승선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23일 오전 11시에 끝났는데 승선 인원은 14,000명이었다. 미군은 피난민을 실으려고 내려놓은 항만 시설과 군수물자 25만 톤에 폭탄을 설치했다. 12월 23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흥남부두를 떠나자, 갑판에 탄 피난민들은 부두가 폭파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배 안은 정적이 흘렀고 몇몇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음 날 12월 25일 아침 중공군 27사단이 흥남을 점령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북한이 동해안에 심어 놓은 수많은 기뢰에도 불구하고 28시간 후 12월 24일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되고 대신 거제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루 선장은 부산에서 서남 방향으로 80km를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3일간의 항해에는 물도 음식도 없었다. 피난민들은 뱃멀미 때문에, 구토에 시달렸고 생리현상은 앉은자리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파도에 움직이면 지하 화물칸의 오물도 파도처럼 출렁였고 위 칸의 오물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갑판 위 사람들은 임시화장실에 산처럼 쌓여 얼어버린 오물 위에 또 볼일을 봐야 했다. 자리가 없어 서 있던 사람들은 추락사를 피하고자 난간에 혁대나 새끼줄을 자기 몸에 메고 잠을 잤다. 갑판의 피난민들은 영하 20도의 추위를, 지하 화물칸의 피난민들은 선박용 기름 냄새와 오물 냄새를 견뎌야 했다.      

  1950년 21살이었던 2등 기관사 멜 스미스 씨는 사흘간 단 한 번도 열 수 없었던 배의 화물칸을 거제도에 정박하고 열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는 피난민들의 반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눈빛을 94세가 된 기관사는 잊지 않고 있다. 오히려 3일 동안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고 선원들은 아이들에게 김치 1호부터 5호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김치 1호는 서울에 거주하는 손양영 씨고, 김치 5호는 거제도에 있는 장승포 가축병원의 이경필 원장이다) 그리하여 14,005명이 거제도 땅을 밟았다. 귀가 얼어 터지는 영하 30도의 눈보라 치는 흥남에서 탈출했던 피난민들은 거제도에 내려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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