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장군님, 응원봉 보셨어요? 1

까칠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DNA

by 수연길모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1552~1617)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는 마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가 전쟁을 준비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모두가 도망갈 때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6월 1일은 일본 선단이 오늘날 부산 영도 앞바다로 몰려든 5월 23일부터 헤아려, 채 열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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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의 16세기는 사뭇 달랐다. 조선은 평화 시대였으나 일본은 100년간 전국시대를 거친 통일의 과정에서 전투경험은 축적되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조선을 순식간에 휩쓸며 동래성을 침공했다. 동래성은 조선 방어 체계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조선군과 민간인들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이 소식은 곽재우에게 충격을 주었고 결단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41세 망우당은 물려받은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의병 모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옷을 벗어 의병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은 의병 처자에게 나누어 줄 만큼 장비와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창의적인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전술적으로 크게 뒤처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곽재우는 전면전보다 매복, 위장, 기습 등 게릴라전을 택했다. 일본군은 강력한 무기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약점이 있었다. 곽재우는 승산이 있다 믿었고 마침내 붉은 비단으로 철릭을 만들어 입었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16세에 그의 외손녀사위가 된다. 칼을 찬 선비라 불리는 조식은 제자들에게 학문뿐 아니라 병법도 가르쳤다. 곽재우는 1582년 과거 시험 정시庭試에 을과乙科로 합격했을 정도로 명망 높은 문관 집안의 자제였으나 활쏘기, 말타기까지 능했다. 그의 의병 정신은 선비란 문무 겸비와 더불어 배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스승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정암진 전투, 진주성 전투, 화왕산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곽재우는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거기에 더해 의병이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났고 전라도로 향하는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이순신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조선의 조속한 승복을 예상하고 팔도를 분할 통치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의병’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왕이 달아난 뒤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백성을 일본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의병을 처음 일으킨 곽재우의 붉은 옷은 비극을 희망으로 바꾸는 전환점이자, ‘백성’이라는 보통명사가 ‘의병’이라는 고유명사가 되는 매개체가 되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민은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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