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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준 Jan 17. 2021

노비 만적의 정체는

만적은 뭐 하던 사람이었을까

무신정권 시기에는 노비를 비롯한 피지배층의 움직임도 두드러지는데, 과연 이 시기에는 수많은 민중들의 불빛이 타오르다 사그라졌습니다. 이 때 줄곧 이야기되는 인물이 만적입니다. 천민들 중에서도 이의민과 같은 고관 대작들이 나오자 고려의 노비들도 크게 술렁였을 것입니다. 그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죽은 지 2년이 지났고, 최충헌이 왕을 갈아치운 지는 고작 한 해가 흘렀을 무렵이었습니다. 천민이 장상이 되고, 신하가 왕을 죽이거나 내쫓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 여러 노비들 사이에서 만적이 그 유명한 연설을 외칩니다.

“장상(將相)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노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당대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탓인지, <고려사> 최충헌열전에서는 만적의 이름과 행적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만적은 신분제도란 결코 숙명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 진승이 농민 반란을 일으킬 때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연설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만적이 이를 인용한 것입니다. 노비 만적은 사회의 동향을 바라보며 정말 각성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노비가 옛 고사까지 인용할 만큼 의식화되었던 것일까요.

만적은 개경의 북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최씨정권과 밀접히 연결되었던 김(인)준 같은 노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저 잡일을 하는 노비에 불과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무식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계획한 봉기는 공사의 노비는 물론 궁중의 환관들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대규모의 봉기였습니다. 또한, 먼저 최충헌을 죽인 뒤 각자 주인을 차례로 때려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울 것이며, 이를 위해 ‘丁’자를 자신들의 표식으로 삼아 서로 식별하자는 등 구체적인 행동 계획까지 수립하면서 제법 치밀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전통 사회에서 난이 실패로 끝나면 왠지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피지배층의 난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적의 난 또한 한때 봉기 계획에 가담하였던 노비 순정의 배신으로 집단 처형이란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불과 수백 명의 노비가 모인 것에 실망하였던 것을 보면 예상했던 규모는 훨씬 더 거대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충헌의 무신정권도 연루자들을 다 죽일 수 없어 아마도 주모자였을 백여 명 정도를 처형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쳤다 하니, 사상 초유의 노비 반란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대규모의 노비 전쟁을 이끌려 했던 만적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노비라는 존재가 주는 인상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노비 만적의 발언, 그리고 당시 논의된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저는 어쩌면 그가 양인 출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는 최충헌의 노비가 되었고, 그 때문에 최충헌을 몹시 증오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제 몸을 노비들 속으로 내던진, 야망을 품은 지식인 출신은 아니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만적 이전에 이미 다른 누군가가 노비들 사이에서 그런 의식화를 하고 있었고, 만적 또한 그에 감화된, 각성한 노비가 아니었을까요.

근현대도 마찬가지지만, 전통 사회의 기록은 지금 보기엔 아무래도 불충분하여 그 전모를 확실히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만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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