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영欽英_유만주
세계적으로 일본사람들이 메모하고 기록하는 것을 잘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선인들도 사소한 일까지 문자로 남겨 전하려는 정신이 강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문건의 <묵재일기>,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개인의 생활을 시시콜콜 기록한 일기라기보다 역사 속의 생활상을 재구성할 때 꼭 필요한 중요 문헌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이 책을 읽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생생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34세에 요절한 유만주(1755-1788)는 24책이나 되는 방대한 일기 <흠영欽英>을 남겼다. 그는 스물한 살 되던 1775년 정월 초하루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를 쓰겠다고 다짐한 후 13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일기장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어난 일을 날마다 기록하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이 없지 않아 내 한 몸에 모여든 일이 언제고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날이 다르고 달이 다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가까우면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멀어지면 헷갈리며,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일기를 쓴다면 가까운 일은 더욱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먼 일은 헷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은 일기로 인해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일기로 인해 조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흠영>은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18세기 후반의 살아있는 역사라 불러도 좋을 만큼 내용이 풍부하다. 무미건조한 일기와는 격이 다른데 일기를 세상과 인생을 관찰하려는 일정한 계획에 따라 체계를 갖추어 썼기 때문이다. 1780년, 그는 일기를 써나가는 방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일기는 성인과 영웅의 사업에서부터 작게는 서민과 미물의 생성까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그대로 기록해 둔다. 제사에 어떤 물고기와 어떤 과자를 올렸는지, 병을 고치는데 무슨 약을 처방했는지, 책은 무엇을 편찬했는지, 얼마 만에 옷을 갈아입었는지, 쌀값은 얼마나 오르고 내렸는지 등을 모두 적어 놓는다.
입던 옷을 언제 갈아입었는지?! 그 대목에 이르면 웃음이 나온다. 언제나 꼭지를 틀면 수돗물이 펑펑 나오고 목욕 시설과 세탁기가 흔한 현대의 삶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흠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독서 경험과 사유의 기록이다. 그는 다양한 책을 되풀이해서 읽고 그에 관한 소감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그날그날 쓴 자신의 시와 산문을 수록해서 일기로 작품집을 대신했다. 일기는 글쓴이의 생활과 생각, 인간적 면모를 두루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