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해당(涵海堂)_이종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부분)이다. 이 시는 모든 사물들이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즉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이름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야만 우리의 인식 세계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재탄생한다. 조선의 학자들은 주거공간에도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집의 이름은 지은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함해涵海라는 것은 내 서실의 이름이다. 내가 빌려 사는 남촌의 집은 기둥이 겨우 여덟 아홉이고, 기둥 바깥에 있는 빈 터도 겨우 백 여 평 남짓 된다. 달팽이집이요, 게딱지집이라 부르는 곳이다. 가운데에 기둥 하나를 세우고 초가로 지붕을 이은 곳이 바로 함해당이라고 부르는 집이다. 이곳은 모르긴 해도 바다와 몇 백리는 떨어져 있을 것인데 어찌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는가? 상상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눈은 내 방 안에 있지만 오래도록 사방의 벽을 보고 있노라면 벽에서 파도 문양이 생겨나 마치 바다를 그려놓은 휘장을 붙여놓은 듯하다. 절로 마음이 탁 트이고 정신이 상쾌해져서 내 자신이 좁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이 때문에 일어나 책을 마주하면 유창하고 쾌활하게 읽힌다. 마치 내 가슴을 바닷물로 적시는 듯하다. 그러니 예전 몰운대가 어찌 바로 내 집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사는 달팽이집이 바로 바다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집을 바닷물로 적신다는 함해라 이름한 것은 엉터리가 아니다.
양명학자 이종휘는 1752년 부친의 임지인 창녕에 갔다가 몰운대와 해운대에서 바다를 보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남산 아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함해당涵海堂’이라 하였다. 그는 남산 아래 부산 앞바다를 끌어들였듯이, 함해당에서 책을 읽으면서 동서고금과 우주만상의 이치를 유추하여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랑하여 인현왕후를 폐하려 할 때 오두인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이세화(1630-1701)는 절조가 높은 선비였다. 그는 자신의 집 이름을 막걸리라는 뜻에서 ‘백주당白酒堂’이라 하였다. 막걸리의 백(白)에 의미를 부여하여 청백(淸白)의 뜻을 끌어들였다. 이세화는 사물은 백의 본바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은 청백의 절조를 끝까지 지키는 이가 거의 없다며 세태를 개탄했다. 그리고 자신의 백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이 초가에서의 청빈한 삶이요, 청빈한 삶에는 막걸리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그가 노년에 청백리에 뽑혔으니 실제 그렇게 살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