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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Aug 18. 2021

1. 서양보다 앞선 생태주의적 사고

지렁이탕을 먹지 않는 뜻_채제공


    적어 보낸 약방문을 보니, 대감이 나를 사랑하여 살리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소. 대감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런 것을 받을 수 있겠소? 비록 그렇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에 슬픔이 없을 수 없다오.

   살기를 기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지렁이나 나나 한 가지라오. 저 지렁이는 마른 흙을 먹고 흙탕물을 마시니 일찍이 나와 다툴 바가 없고, 뱀의 이빨도 없고 모기 주둥이도 없으니 나에게 독이 된 적이 없다오. 지금 나의 우연한 병으로 인해 저 허다한 생명을 죽인 다음 불로 익히고 녹여 탕으로 만들어 복용하여 즉시 효험이 있다면, 효험을 얻은 사람은 다행이지만 그 지렁이로서는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 아니겠소?     


  이 글은 조선조 정조임금 당시 좌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이 쓴 ‘지렁이탕을 먹지 않는 뜻’이다. 일흔의 채제공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절친한 벗 이헌경은 수소문 끝에 지렁이탕이 좋다는 말을 듣고서 이를 조제하여 먹도록 권유한다. 그러자 채제공은 벗의 뜻을 아름답게 여기긴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무고한 생명을 해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 얼마나 멋진 글인가. 모든 존재가 서로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고 사라지는 의존적 관계, 상생적 존재라는 것을 우리 선조들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서구의 전통적 윤리관은 인간중심적이었다.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밖의 다른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라는 견해였다. 참으로 오만한 이러한 발상이 지금 우리 지구별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대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삶과 인간사회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현재 코로나19 상황이야말로 인간이 자연을 훼손한 결과 되돌아온 큰 대가라고 하지 않던가.


  오늘 또 옛 어른에게서 큰 지혜를 배웠다. 욕심과 어리석음에 갇혀 있는 우리는 언제쯤 서로가 상생적相生的 존재라는 것을 체득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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