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선비들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상담심리 프로그램 중에 미리 쓴 유서를 서로 발표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유서를 미리 쓰는 일이 우리의 오랜 전통 속에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도하는 자만시(自輓詩)와 자신의 무덤에 스스로 쓴 자찬묘지명이 그것이다. 먼저 산운 이양연(1771-1856)의 자만시 <내가 죽어서>를 감상해보자.
한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 밝은 달은 봐도 부족했었지
이제부터는 만년토록 마주볼 테니/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진 않군
한평생 괴로운 인생에 부대끼며 사느라 하늘에 뜬 밝은 달조차 편히 즐기지 못했는데 이제 죽게 되었으니 생전에 누리지 못한 달빛 감상을 실컷 하게 되었다는 표현에서 죽음을 앞둔 노인의 체념과 달관이 느껴진다.
자찬묘지명은 자신의 죽음을 타자의 죽음처럼 차분하게 응시하는 것, 죽음에 직면해서 자신의 인생을 냉정히 돌아보는 글이다. 《여유당전서》에 쓴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매우 유명하다. 다산은 스스로 두 편의 묘지명을 남겨서 남들이 자신을 두고 왈가불가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놓았다. 그 점에서도 다산의 오기를 읽을 수 있다.
말을 꺼내면 반드시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행동을 하면 반드시 풍속과 어긋났다. 제 성질대로 살기 때문에 집안사람조차 가까이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벗들도 그를 버렸다. 문장을 일삼지 않으니 돼먹지 못한 글쟁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천한 주제에 귀한 자를 섬기지 않으니 버릇없는 사람이라 비난당하는 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천지 사이에 나 같은 자가 있어서 되겠는가?
남종현(1783-1840)의 자찬묘지명을 보면, 성현인 안연과 천하의 흉악한 도적인 도척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요순 임금 같은 성인도 매사에 잘할 수 없다는 둥 선비로서 용납되지 않는 주장을 서슴없이 발언한다. 하지만 결국 자기 같은 자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자학하는데 이런 글을 남이 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자, 우리도 이번 기회에 자찬묘지명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