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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May 25. 2022

29. 선비들이 탐냈던 사물 (3) 괴석

_돌은 천지의 뼈, 구름의 뿌리

내가 어렸을 때는 우표나 옛날 돈을 수집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앨범에 넣어서 소중히 보관하던 그것들을 틈만 나면 꺼내서 자랑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헤르만 헤세도 한때는 나비 채집광이었다. 책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문예출판사)에는 그 내용이 산문과 시에 담겨 있고 헤세가 직접 그린 나비 그림도 감상할 수 있다.      


송나라의 서화가 미불은 기암괴석을 좋아해서 기이한 돌을 만나면 절을 하며 ‘석石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괴석怪石은 작은 크기의 돌부터 집채만 한 바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괴석을 해석하면 괴상한 돌, 이상한 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괴상하다는 말은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신비하고 오묘하다는 긍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로부터 돌은 모든 자연물 가운데 천지의 정밀한 기운을 부여받은 대상물로 여겨졌다. 괴석이 지닌 불변성은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과 부합되어 문인들 사이에서 회화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세종 때 문인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괴석은 굳고 곧은 덕을 갖고 있어서 참으로 군자의 벗이 됨에 마땅하다.” 라고 말했다.  


청나라의 <개자원화보>에서는 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돌은 천지의 뼈요 氣도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돌을 구름의 뿌리〔운근雲根〕라고 한다. 기가 없는 돌은 무딘 돌 완석〔頑石〕이니 이는 기가 없는 뼈가 썩은 뼈〔후골朽骨〕인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의 문인들이 정원에 괴석을 배치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다. 집 안에 대자연을 끌어들이는 방식의 하나로, 이른 시기부터 석가산石假山이 유행하였다. 익산 왕궁리의 옛 백제 정원의 괴석과 경주 안압지에 배치된 정원석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석가산이 못 안에 섬의 형태로 된 것이었는데 비해, 18세기 무렵부터는 화분에 올려 정원이나 방 안에 두고 완상하는 일이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태호석을 중국에서 수입하기까지 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완당전집』 ‘괴석전’에서 “반이랑 구름 섬돌에 뭇돌이 무리지어, 머리마다 주름지고 구멍마다 영롱하다”며 괴석이 가진 산수 운치를 노래했다. 또 신위는 돌에 미쳐 돌을 주우러 다녔고, 심지어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가는 곳마다 돌을 주워 수레에 가득 싣고 그 모습을 동행한 화가에게 그리게 한 후 장편의 시를 지은 일도 있다.     


괴석도는 19세기 문인들의 애석愛石 풍조와 함께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추사의 절친이었던 황산 김유근(1785-1840)은 괴석을 주로 그렸다. 추사가 활동할 시기에는 실물의 괴석을 수집하는 풍조가 만연하였지만, 그림을 그린 전문 화가나 문인화가도 거의 없을 때라 황산의 괴석도는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황산의 괴석도는 실어증이 있기 전인 1836년 초쯤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먹의 농담만으로, 그것도 초묵의 갈필로 그린 그림은 보면 볼수록 묘한 느낌이 든다. 친구 권돈인은 연경에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가 곽의소의 화제를 받고, 주성지와 애창의 발문을 받아다 화첩을 꾸민다.      

_황산 김유근의 괴석도

 추사의 제자 허련은 남종화가 지닌 문장의 기세와 화풍을 추구했지만, 괴석을 스치는 붓질과 제시를 쓴 필치에서 추사 서체의 잔영이 엿보인다. 몽당붓으로 쓴 속도감과 절제된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붓놀림이 추사체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그가 추사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를 공부할 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_소치 허련의 괴석도

 고종 때 괴석의 대가 몽인 정학교(1832-1914)가 나타난다. 정학교는 괴석을 잘 그려서 '정괴석'으로 불렸다.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과 돌림자가 같지만 정학교 집안은 중인이다.) 정학교의 괴석은 생김새 자체가 기이한 데다 구멍이 숭숭 뚫린 공간이 있어서 대단히 조형적이다. 그는 세로로 긴 화면에 농묵과 담묵을 적절히 사용하여 수직으로 상승하는 괴석의 형상을 즐겨 그렸다. 괴석의 독특한 생김새를 다양한 필치로 그리고 담묵으로 번지는 듯한 효과를 내는 등 수묵화의 여러 기법을 동원하였다.   


또한 그의 그림이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화면 한쪽에 그의 유료한 필치의 화제가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의 글씨는 흘림이 강한데 이를 '몽인체'라고 불렀다. 정학교에 의해 크게 유행한 괴석도는 이후 문인 서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수직으로 상승하는 구멍 뚫린 각진 괴석도 화풍을 계승하였다.      

             _몽인 정학교의 괴석도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 가면 마당 한쪽에 ‘연지석가산’이 있다. 표지판도 설치되어 있는데 연못 한가운데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형상이다. 그런데 다산의 둘도 없는 벗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를 보면, 연못 안에는 석가산이 없고 언덕 위에 커다란 괴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 본래의 초당도 복원하면서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다산이 쓴 글로 미루어볼 때 ‘다조’의 모습도 현재의 평평한 반석과는 전혀 다른 형태일 거라고 한양대 정민 교수는 주장한다. 앞으로 많은 고증을 통해 제대로 복원되길 희망하고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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