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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May 17. 2022

28. 전설적인 ‘컬렉터’들

_상고당 김광수, 석농 김광국  그리고 간송 

서울 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보화수보(寶華修補)- 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 전을 다녀왔다. 수보(修補)는 ‘낡은 것을 고치고 덜 갖춘 곳을 기우다’라는 뜻이다. 이번 전시는 2014년 가을 이후 7년 만으로, 소장 유물 중 문화재청의 지원사업을 통해 보존 처리된 작품 8건 32점을 선보였다. 작품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해체 수리에 가까운 대대적인 수리를 한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전시 작품 중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화 수장가 석농 김광국의 <해동명화집>이 돋보였다. <해동명화집>은 안견의 '추림촌거', 신사임당의 '포도', 심사정의 '삼일포' 등 그림 28점이 들어 있는데 김광국이 수집한 회화 작품을 모은 <석농화원>의 일부분이다. 김광국 사후 간송 전형필이 흩어진 작품들을 다시 모아 별도 장정을 거쳐 <해동명화집>으로 펴냈다. 나는 ‘보화수보’ 전을 관람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 나섰던 간송 전형필의 얼과 시대정신을 새삼 떠올렸다.      


조선 시대에도 많은 미술 수장가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화를 사서 모으는 일은 웬만한 사회적 지위와 탄탄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누리기 어렵다. 그래서 그림을 완상하는 행위는 왕이나 종친의 전유물이었고 세종 때는 안평대군과 인조 때 낭선군 같은 왕손들이 서화를 많이 수집하였다. 조선 후기에 중인과 신흥 부유층이 부상하면서 상고당 김광수와 석농 김광국이 등장하게 된다.


영조 시대의 상고당 김광수(1699∼1770)는 문벌을 유지해 온 가세를 바탕으로 부유한 신분을 누렸으나, 세상의 험난함과 관직의 화려함이 싫다며 벼슬을 버리고 예술에 심취하여 살았다.      


“서화를 가지고 와 팔기를 원하는 자가 있고, 진실로 그것이 자신의 뜻에 합당하면 비록 옷을 벗고 곳간을 기울여서라도 사면서 아까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건의 출처와 아속(雅俗)을 잘 분별해 어떤 그림 족자가 있으면 채 반도 펼쳐보기 전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즉시 판단했다. 감상안이 있었기에 수집한 것들이 모두 정품(精品)이었다.”  _이덕수의 서당사재 4권  ‘상고당 김씨전’     


김광수의 소장품은 서화 외에 희귀본 서적과 청동솥, 고비탑본, 중국의 다기, 벼루, 붓, 먹, 인장 등 다양했다. 연암 박지원도 그를 두고 “서화고동에 있어 개창의 공이 있다”고 인정했다. 문제는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다. 호고(好古) 취미가 어찌나 강했던지, 집을 살 때 뜰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를 보고 두말없이 비싸게 산 적도 있었다. 컬렉션이 불어날수록 가산은 줄었고, 집안이 빈궁해지자 하인들은 떠나갔다. ‘벽(癖)’, 말 그대로 고질병이 된 것이다.


컬렉터로서 김광수는 19세기 후반을 휩쓸었던 금석문 수집 유행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국진체로 유명한 막역지우 원교 이광사(1705∼1777)는 그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중국 한나라와 위나라 때 비문을 사들인 사실을 전한다. 또한 북송의 도시 풍경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소장하여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에게 북학 의지를 고양시켰고, 1744년에는 와룡암에 김광국과 심사정을 초대하여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에 소장하던 그림 일부를 김광국에게 승계하였다.    

 

정조 시대의 석농 김광국(1727~1797)은 비록 중인 계급이었지만 높은 교양과 학식을 갖추었고 그림을 볼 줄 아는 안목으로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현재 심사정의 ‘와룡암 소집도’에는 김광국 자신이 쓴 화제가 붙어 있다.     


“갑자년(1744) 여름에 나는 와룡암으로 상고당 김광수를 찾아갔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품평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때 현재 심사정이 밖에서 허겁지겁 뛰어왔고 잠시 후 비가 그치자 현재는 급히 종이를 찾아 ‘와룡암 소집도’를 그렸다.”     


1744년이라면 상고당 김광수는 56세, 현재 심사정은 38세 그리고 석농 김광국은 불과 18살이었다. 김광국은 이처럼 10대부터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당대의 문인, 화가들과 교류하며 서화를 감상하고 수집하였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가 있다. 한갓 쌓아두는 것이라면 잘 본다고 할 수 없고, 본다고 해도 칠해진 것밖에 분별하지 못하면 아직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도 오직 채색과 형태만을 추구한다면 아직 안다고 할 수 없다. 안다는 것은 화법은 물론이고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오묘한 이치와 정신까지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  _유한준의 <저암집> (<석농화원>에 붙인 발문)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다음과 같이 컬렉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미술 애호는 음악 감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급 취미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미술품 애호가가 작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술문화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술품 컬렉터는 그 시대 미술문화의 강력한 패트론으로 되고, 민족문화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메디치와 우리의 간송 전형필이다.’(경향신문 2016.4.26.) 월탄 박종화도 “간송은 막대한 돈을 들여 민족의 얼을 사들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1936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고미술 무역상 야마나카 상회와 경매에 나온 조선 백자 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때 간송 측이 승리한 액수 1만 4580원은 당시 기와집 15채 가격이었다. 그리고 간송의 많은 업적 가운데 백미는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 구입이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서문 포함)’는 전해졌지만 한글의 창제 동기와 원리가 적힌 ‘해례’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 해례본이 출현함으로써 모든 궁금증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음 달 6월 5일 ‘보화수보’ 전이 끝나면 보화각은 보수공사에 들어간다. 보화각은 미술품 보존과 활용을 위해 간송이 1938년 건립한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심사정 '와룡암 소집도', 김광국 화제


     훈민정음 해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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