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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ma Aug 22. 2021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하루 하나씩.

삶은 선물이랍디다.

새벽에 출근하고 집에 와서 쓰러져 자고.

남들 다 그렇게 산다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내니, 마흔하나가 되어버렸고, 약간 질려버렸다.


 그저 빛의 속도로 늙기에만 전념하다보니 팽팽한 줄 같던 내 모든 감각은 사라졌고 일기 한 줄 남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일기라도 써보자고 마음만 백번 먹기를 반 년. 또 추석이 다가오고, 곧 크리스마스 스벅 다이어리 행사가 시작 될일을 상상하자, 진짜 질려버렸다.


그 때, 모든 것을 체념한 장기수마냥 넋 놓고 쳐다보던 유튜브에서 어떤 강연자가 말했다.

하루에 하나씩.

뭐든 하나씩 좀 해보라고.

하루가 365개가 되고, 1년이면 3650개가 되는데, 그거 왜 안 하냐고.

오늘은 어제의 누군가가 그렇게 기다렸던 내일이고 블라블라.

좋은 말씀들이 넘쳐나 그저 주르륵 흘려들었는데,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내가 즐거웠던 일 하나, 오늘 나를 슬프게 했던 일 하나. 이렇게만 적어 놓아도, 돌아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게 해 주세요."




만날 사람이 없어지자, 내 스벅 다이어리는 풀지도 않고 버리던 수학 문제집처럼 깨끗하게 남겨졌다. 내 하루하루는 도대체 뭘 하며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뭐 하나 아쉽지도 않았다. 이렇게 흘러간들, 저렇게 흘러간들. 나는 밥벌이 걱정이나 할 것이고, 여차저차 어영부영 은퇴를 맞이할 수도 있지. 늙으면 죽어야지 등등의 짙은 패배의식이 짓이겨 놓은 루저(Loser) 그 자체로 살았다. 어느 순간은 이런 내가 너무 싫어서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그 날 먹은 것이라도 써보자 싶었다. 아침에는 커피 한 잔, 점심에는 칼국수. 3일을 못 가서 기록은 끊어졌다. 회사에라도 놔 두면 자연스럽게 쓰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 걸. 회사 서랍 뒤편에서 자리만 차지 하고 있은지 반 년이 넘어갔다. 구글 캘린더에 내가 만난 사람들을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마저도 관뒀다. 모두 일로 만난 사람들, 내년엔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자신이 불쌍해졌다.


길을 걸어가면 한숨이 나오고,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유 없이 한 숨이 이어지고, 숨 쉬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는데, 경미한 공황장애 증상일 수 있다고 했다. 호흡기 이야기나 할 줄 알았던 의사친구가 이런 얘기를 하자,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묻지는 못했다. 문득 뭐라도 더 보고할 것이 없나 이 팀 저 팀 넘나들며 질문을 해대는 파트장이 생각났다. 가끔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회사와 본인을 동일시하는 그의 세계관이 부러웠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 그가 고3보다 더 열정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고 싶지 않다. 귀찮은 대화를 나눠야하는데,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나를 반기는 강아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죽었을 지도 모른다.


 



인생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는데, 그 때마다 나는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목표랄 것 없는 채로 살아온지 오래인데,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점에 대하여 취조 당하는 기분. 늘 불편했다. 늘 목표지향적이던 사람들에 둘러쌓여 살아왔다. 다음 스텝을 위해서 이 사람에게 이걸 물어보고 다음엔 저걸 캐내야 한다는 사람을 피하기 쉽지 않았다. 차라리 고독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에 알라스카 같은 곳에 이민 가면 어떨까 고민해본 적도 있다.


그런데 문득, 이것도 목표가 될까 궁금하다.


나는 잘 죽고 싶다.

어느 순간 죽게 되더라도, 눈 감을 때 미련 없었다고 웃으며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남겨놓은 재산이 많아 아까워서 어떻게 눈을 감냐는 소리는 이미 들을 걱정 없어서 다행이지만, 하지 못한 말이 많아서 속상해서 어떻게 눈을 감냐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행복했다.

맛있었다.

보람찼다.

뿌듯했다.

멋있었다.

사랑했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마지막 순간에 몰아 뱉느라 아쉬워하지 않도록, 내 하루를 사랑스럽게 가꿔보자.

그래.

아빠는 그렇게 말 한 마디 못 해보고 나를 떠나면서, 얼마나 속이 미어졌겠나.

삶은 선물이라질 않는가.

선물을 받아 놓고, 숙제처럼 머리만 아파할 일인가.

마흔하나까지 버티느라 수고 많았다. 앞으로도 언제가 되든, 매일 잠들기 전에 웃다가 자렴.

너의 하루는 복된 하루다.

너의 하루는 한 번뿐이다.



그냥 매일 매일 무엇에 질려서, 무엇에 끌려가서, 무엇에 휘둘려서 살아져버리지 말자.

오늘부터 나는 하루에 하나,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을 기록한다.


오늘. 2021년 8월 22일.

즐거웠던 일은 내 강아지 복순이가 로봇 청소기를 더이상 무서워하지 않고 졸졸 쫓아간 것을 본 것. 복순이가 움직이는 에브리봇을 여유 있게 살펴볼 정도로 용감해진 것이 대견하고 뿌듯하다.


슬펐던 일은 회피하고 싶었던 내 벌크업을 옷으로 확인했다는 것. 17년 이후 15키로가 쪘으니, 정말이지 방치된 중년 초입이었다, 어제까지의 나는.


 



갑자기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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