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은 사람은 그렇게 안 한다.
모처럼 친구들을 만난 자리, 어쩌다 보니 가방을 주네 마네 하던 친구도 자리에 함께 했다.
나처럼 촌스럽게 굴 것을 걱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써 조심스럽게 다른 얘기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원래대로) 씩씩했다. 그리고 새로운 소식도 있었다.
"내가 요즘 썸 타는 사람이 있었거든, 근데 걔는..."
하하하. 가방은 차치하고, 롱디가 있다더니, 게다가 새로운 썸.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싶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괜찮아야지, 에너지 빨린 것도 억울한데, 더 잘 살아야지."
"마지막에 '뻥'하고 차 준거야?"
"그럼, 내가 카톡으로 '꺼져.'라고 했어."
나는 궁금했다. 그에게는 가방이 남아 있는데.
"가방을 순순히 포기해준거야?"
"말도 마, 그거 챙기느라 힘들었어."
그토록 눈물을 쏟게 했던 가방을, 힘든 싸움 뒤 쟁취한 친구에게 격하게 축하를 남겨야 했지만,나는 그녀가 카톡으로 이별했다는 말이 주는 충격에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하진 못했다.
카톡 이별. 어디서 본 적 있다. 카톡으로 남기고 잠수타는 것이 대세인 '요즘 애들'이라는 글.
나는 요즘 애들인가 아닌가, 도통 와닿지 않았다.
나더러 2030, 젊은이라고 지칭할 때
나는 저기서 어느 구석에 분류되어야 하는지 가끔 자신이 없곤 했다. 특히나, '요즘 애들, 요즘 젊은이' 여부를 '카톡 이별'이 가능한지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단언컨대' 나는 젊은이가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동안 적어도, 남자와 여자는 그 시점 최고의 친구이자, 연인이다.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를 존중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응원하던 Best Friend.
그가, 나에게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라는 이별을 얘기하면서 '카톡'으로 남긴다면, 어떤 기분일까.
좋을 때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좋을 때는 모두가 천사다. 사람의 진가는 그 바닥이 드러난 때 알 수 있다. 코너에 몰렸을 때, 거짓말 할 수 있는 여유가 박탈되었을 때, 그 민낯이 보인다.
이별하는 방법을 보면,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제아무리 세기의 사랑을 했더라도, 그가/그녀가 상대방을 떠나갈 때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정말 좋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좋은 이별이 무엇인지 '말해봤자 쓸데없는 토론'이 있었다.
카톡 이별이 그렇게 나쁘면, 불러도 대답없이 잠수타는 것은 좋은 모습인지 질문이 나왔다.
"착한 척 하는 거긴 한데, 독한 소리 마음에 남으면 뭐해. 나 너 싫으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못을 박히면, 그게 그렇게 좋은가?"
"연락 기다리다가 애닳는 꼴 안 봤어? 그냥 말 해주는 게 나아."
"그러니까, 그 말은 만나서 해야지. 할 얘기가 있다고. 그래도 마지막이잖아. 우정이든 사랑이든 그 마지막인데 어쩜 그렇게 일방적이야."
"볼 장 다 본 마당에 무슨 선비 났어? 그만하자고 얌전히 말해주면, 매달릴걸? '이제 끝이구나'라고 고분고분 알아 들어줄까?"
난 선뜻 끼어들기 어려웠다. 말없이 뭉게던 그를 생각하면, 나는 당연히 만나서 잘 있으라는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거창한 이별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그래, 여기까지다. 이제 나를 벗어나 살아라. 행복해라.' 악수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어보니 무엇이 진짜 좋은 이별인지 자신이 없었다.
돌이켜보니 나란 사람의 몇 안 되던 이별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별은 나를 불러 앉혀 놓고 그 동안 고마웠다는 얘기로 끝났고, 어떤 이별은 그의 일방적인 잠수로 끝났고, 어떤 이별은 나의 애매한 태도를 못 견딘 그가 내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지 묻다가 끝났고...
그와의 이별은 어떻게 끝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의도가 뻔하게 보이는 얘기를 숱하게 남겼다.
'잘 살아, 행복하길.'
그는 한동안 못 들은 척했다.
'알만한 애가 왜 이런 소리야. 무슨 뜻인지 모르고 하니.'
우린 계속 미적거렸고, 질척거렸고, 그는 내 핑계를, 나는 그 핑계를 댔다.그러다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을 한 것은, 내게 어떤 모진 일이 생겨도 그는 다른 핑계를 대고 나를 모른척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다는 의지는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때, 겨우 그 때서야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나의 남자가 아니다. 그는 스쳐지나가는 아무나 중의 하나였다. 나의 종착역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나를 무력하게 하였고, 나는 이별을 선택했다. 여전히, 아직도 완전히 이별을 완성하진 못하였지만.
좋은 이별이란, 결국 내가 놓아 잘 끝나는 것이다.
모든 일의 순리는 유사하다.
스스로 구원하라.
아야꼬 할머니는 '받는 입장'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렁뱅이 근성이 인간의 보편적인 근성이긴 한데, 노인이 부축을 받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부축받지 못한 것을 불평해서 불행한 것이라고.
나는 좋은 이별을 받지 못해 불평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