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응원하고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이직을 한 뒤 3주나 되었던가,
새로 맡은 일을 잘 해보려고 고군분투하던 중, 인상적인 사람을 만났다.
경쾌한 목소리, 다부진 말투, 질문하는 모든 이에게 아이 컨택을 주저 하지 않는 당당함.
그는 아주 영특한 인상에 싹싹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는데, 싹싹한 미소의 대반전은 칼을 뽑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승부사라는 점이었다.
누구든, 그것이 대표님일지라도, 그의 프로젝트에 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상대방에게 그를 압도하는 논리의 공격을 순식간에 쏟아부었다. 승부를 내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승부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 읊어대는 통에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은 터치 하지도 못 한채 회의가 끝났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의 첫번째 회의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직장의 칼라에 대해서 몹시도 기대하게 만들었었다. 그는 그렇게 화끈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늘 오손도손 잘 맞았던 것은 아니다.
나의 직역 덕분에 나는 본의아니게 그의 업무 내용에 관하여 빨간 펜을 드는 순간도 있었고, 그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순간, 그의 능력을, 그의 장점을, 그의 가능성을 대단히 아꼈다. 그는 촉망받는 우리 본부의 주포였다.
그런 그가 퇴사했다.
몇 주전 모든 것을 내려 놓은 듯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던 그의 퇴사는 실제 일어났다.
"가지 말지. 이제사 손 발이 맞는데 아쉬워요."
"나도 아쉬워요. 정말 재미있게 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는 그만두기 싫었지만, 나가게 되었다.
그는 화려한 실적과 빠른 승진에 대한 대가로 온갖 시기와 질투를 받았고, 온 몸으로 괴로워하다 3년을 채운 날 퇴사하게 되었다. 그가 조금 덜 피폐하게 살려면, 그는 이 괴로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야 했다.안 봐도 비디오인 여러 가지 사연들, 남 같지 않은 그의 괴로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내렸을 마지막 결정의 무게,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한데 어렵고 남 일인데 괴로웠다.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또 와요. 대체 인력이 없어."
"과장님이나 잘 버텨요. 오래 있으셔야 내가 다시 오지."
"잘 버틸테니까, 꼭 와요."
내 입으로 뱉으면서도, 내 말이 빈말처럼 들릴까봐 두려웠다. 몇 달전, 내가 지금 뱉는 말들을 남들로부터 들었을 때, 내게는 전부 빈말처럼 들렸다.
진짜 다시 오라고 마음 써주기는 개뿔,
내가 나가면 아웃 오브 안중이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달전, 내게 좋은 마음으로 따뜻하게 배웅하던 그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과장님, 우리 가끔 맥주나 한 잔 합시다. 저 새로 가는 회사 근처에 맛있는게 많대요."
"그럼요, 연락 자주 하세요."
발길 안 떨어지는 걸음을 꾹꾹 눌러 가며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나는 '자주 보자'는 이 오래된 속담같은 값싼 빈말을 어떻게 하면 더 진짜처럼 느끼게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지난 주 금요일은 참, 어렵고 힘들었다.
그는 새로 가는 직장에 대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자위했다. Second Best일 뿐, 여기가 더 좋다는 것은 그와 이야기를 나눈지 5분만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더 괴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가 더 나은데 왜 옮기려고 하니.
괴로움에 퇴사를 결정한 그에게 저따위 질문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이니까. 몰라서 옮기는 게 아닐텐데, 굳이 왜 옮기냐고 물어주면 뭐 하나, 책임감 없이 남의 속만 후벼파면 뭐하나. 여러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과장님, 저는 여유를 찾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요. 저는 늘 응원할 거예요. 어딜 가도 잘 하실 거니까 걱정 안 해요."
그는 씩씩한 척, 새로운 회사의 위치를 읊었다.
나는 최대한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간에서 당신을 보는 마지막.
이제 당신은 가보지 못한 길을 용감한 척 걸어가겠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길을, 굳이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 먹은 당신이 별 일 없이 담대하게 잘 해나가길 빈다.
그에게 이렇게 응원을 쏟아내는 것은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이기도 하지만, 그의 모습이 몇 달전 홀홀단신 막다른 골목에 내쳐졌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인것 같다.
어느 조직이나 응당 '잘려야'하는 사람은 남고, '살아야'하는 사람은 나간다. 이것이 '조직의 논리'라는 미명하에 윗사람이 살아남는 대단한 풍습처럼 느껴진다.
살다보니, 머리 좋은 놈 못 이기고, 돈 많은 놈 못 이기고, 운 좋은 놈 못 이긴다는 말이 참말 같은데, 요즘 들어 새삼 느낀 것이 있다면 '운도 능력'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각설이도 아닌 것이, 매번 죽지도 않고 살아남는 것도 모자라, 조직을 위해 필요한 새 인재를 뭉게고 괴롭혀 못 버티게 함에도 불구하고 좀비처럼 다시 살아돌아오는 운은 그냥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것도 하나의 거대한 능력이니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고개 한 번 크게 끄덕여주고 얼른 그 옆을 떠나라고 조언하고 싶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 자리도 능력 순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사람은 주제 넘게 많은 밥을 먹고, 그 쪽 방면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능력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유배지에서 책을 쏟아냈다는 옛 선비들을 굳이 읊지 않아도, 이런 일들은 하나의 섭리처럼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풍경이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패배주의자일까, 잠시 고민했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힘을 내서 반박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모든 불합리에 대해서 이견을 말할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이렇게 늙어가나보다.
이직한지 6개월. 반년이 흘렀을 뿐인데, 이미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세상은 참 알것 같다가도 모르는 일 투성이다.
연재글이 브런치 내 검색만으로 매일 3000뷰를 찍고 있다.
그 덕에 나는 두 가지 일을 겪었다.
1.
어떤 이가 네이버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남겼다.
내 글이 픽션인지 진짜 에세이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픽션이면 픽션이라고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브런치가 네이버에 연동이 되던가.
아, 내 글을 보니, 내가 누구인지 너무 잘 보였던가.
그럼 내게 연락하지 왜 네이버일까.
아, 본인이 누구인지는 알리고 싶지 않았나.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네이버 블로그로 댓글만 남긴걸가.
나는 내 글이 소설인지 아닌지를 왜 알려야 하나.
알듯 말듯한 이유가 있지만, 그냥 덮고 털기로 했다.
2.
내 글의 일부를 이루는 사람이 포털을 통해 이 글을 읽었다. 분노에 휩쌓였다고 한다.
어떤 여류 소설가는 그녀의 소설에 전 남편과 매우 유사한 캐릭터를 등장시키곤 했다. 주로 못나고 찌질해서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남자로 등장하던 그 남편은 끙끙 앓았다고 한다.
그 남편은 본인이 본인인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게 나라고 얘기하면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되는데, 그래서 아닌 척 하고 싶은데,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내 얘기하는 게 맞고, 그래서 그 소설이 너무 싫고, 전처가 그 소설로 돈 버는 게 너무 싫다고 얘기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다.
다시 펜을 잡기까지 (키보드인가...) 오래도록 고민했다.
하지만 내 인생인데 내 인생에 그 어떤 애정도 없는 전남편을 배려하느라 인생을 멈출 수는 없지.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3.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
내 곁에 당신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친구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당신이야 여전히 나한테 물어볼게 있고 그래서 챙겨볼 것이 있겠지만 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그냥 이렇게 살아야겠다. 외롭지만, 홀가분하다. 나는 내 상처를 스스로 돌보고 있다. 더디지만, 차분하게 아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