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떠나간 나를 인정하시오
내게 소설, 영화 기타 등등을 포함하여 이상형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1초도 망설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레트 버틀러', 답은 정해져있다.
'주말의 명화'가 꽤나 인기 좋던 그 어린 시절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느끼한 콧수염과 태풍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포마드 장착 가름마, 그리고 한동안 '한게임 고스톱'에서 들리던 그 탁음의 남자 성우 목소리는 그냥 어떤 유난스런 영화의 인상깊은 남자 주인공 정도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부터는 내 인생의 남자는 완전히 바뀌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에 이런 남자는 없었다. 레트 버틀러는 누구보다도 '남자'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의 그 장면들만으로는 레트가 얼마나 스칼렛을 사랑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노무(?) 스칼렛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변덕과 기복으로 레트의 오장 육부를 갈갈이 찢어놓는데, 그 때마다 너덜너덜 찢긴 그 상처에 스스로 소금물을 끼얹어가며, 스칼렛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사촌언니의 남편이 되어버린, 첫사랑 애쉴리에게 은근히 피만 빨리고 이용만 당하는 주제에 오매불망 난리법석 어쩔 줄 몰라하는 불쌍한 불나방 스칼렛을 위하여 그가 한 모든 행동들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다.
그 뿐인가. 매번 타이밍 놓쳐가며 사랑을 퍼 부어주는 레트를 (일부러) 못 본척하고 재혼을 해대는 스칼렛을 보다 못한 레트는 마지막으로 그녀가 미망인이 되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젠 제발 나와 결혼하자고 한다. 그 장면은 읽을 때마다 나 혼자 웃는 포인트 중의 하나이다. 속 타는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내 자신이 웃겨서랄까.
어쩜 저걸 받아줄까.
어쩜 저러는 걸 안 버리나.
염치 없이 사람 속만 긁는 스칼렛을 볼 때마다, 역시 더 좋아하면 지는 것이라는 뼈저린 진리를 곱씹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스칼렛을 놓지 않는 든든한 레트에게 매번 반했다. 그는 정말 '보살'같았다.
그러던 레트는 스칼렛을 떠났다.
그가 떠날 때 남긴 말은 그 영화 통틀어 가장 레트답지 않아서 잊을 수 없다.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내 사랑, 이젠 내 알바 아니오.)
이 말은, '이제 저는 어떻게 하죠?" 라고 묻는 스칼렛을 뒤돌아보며 남긴 말이다. 그가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선 것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멜라니가 죽은 날이었다. 스칼렛 대신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사랑하던 딸 보니가 죽고, 허한 마음을 기대지 못해 방황하던 레트는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남의 속도 모르는 스칼렛은, 멜라니가 죽고 이제사 애쉴리가 자동 '돌싱'이 되는 상황에 대하여 표정 관리를 못했다. 한참을 괴로워 하던 레트는 스칼렛에게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사람이면 당연히 느꼈을 한계였는데, 오히려 오래 참은게 신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물론, 저렇게 돌아서는 레트 뒤에 엎어져 잠시 울던 스칼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를 남긴다.
"Tomorrow is another day. (그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거야.)"
참 속 좋은 여자다.
레트가 무슨 순애보를 찍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마담과 술을 마셔 제끼기도 하고, 그래서 스칼렛에게 옴팡지게 바가지 긁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레트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내눈에는) 레트에게는 오직 스칼렛 뿐이었다.
그 사랑을 오글거리게 표현한 것은 아닌데, 그 묵직하고 완고한 사랑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좋을까, 궁금한 순간도 있었다. 맥주맛도 모를 때.
내가 남자에게 바라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을 질리게 날리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만큼 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만 해 주면 좋겠다. 마차 타고 돌아다니던 남북전쟁시대 애틀란타도 아닌데, 그 정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출근하는 길에 한 번, 점심시간에 한 번, 퇴근하는 길에 한 번, 혹은 야근하는 중간에 한 번. 나에게 '뭐하니? 밥은 먹었니?' 정도만 해도 알 수 있다. 아, 이 사람은 내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사실, 그거면 된다고 말하는 나야말로 '레트'과의 여자인지도 모른다.
스칼렛 대신 죽겠다고 온 몸을 던지던 레트. 다른 남자 쳐다보며 줄줄이 재혼하는 스칼렛을 보다 못해 이번 타이밍은 놓칠 수 없다고 빌며 결혼한 레트. 첫사랑 남자가 가장 노릇 못하고 돈 벌이 못한다고 오지랖을 떠는 꼴을 욕하지 않고, 멜라니 핑계대며 거뜬하게 지원해준 대인배 레트도, 마음을 접고나자, '이제 어떻게 살아요?'라고 묻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사랑, 이제 내 알바 아니오."
넘치게 더 좋아해준 그 남자도 마음이 뜨고 나면 남이 된다.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시간을 추억 삼아 웬만하면 상처주기 싫어, 불편하고 괴로웠던 모든 것을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았다.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애정 때문이었다. 내가 괜찮았던 것은 아니다.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 안부를 물을 생각 없었던 사람이 내게 물을 일이 있어 연락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1년 조금 안된 시간동안 내 안부를 물을 새 없었겠지만 침묵하던 나는 이미 문을 나선 레트다.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내 알바 아니야 이제.
내가 떠난것을 받아들여주시오. 나는 완전히 떠났소.
귀신보다 산 사람이 무섭다는 말이 하루종일 생각났다. 아침부터 잠을 설치더니 여즉 잠을 못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