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life

러브 레터 이펙트

오겡끼데스, 한 마디 할 수 있기를

by Nima

전화도 해지하고 독한 마음 먹은 내게 복병이 생겼다.

바로 사무실 내 맞은 편의 매니저님.


나는 이직한 것도 모자라, 3주 전, 회사 내에서 신설된 팀으로 보직 변경되었는데 보직 변경 전 1주일 연수를 받고 돌아오니, 새로운 내 자리가 무척 위험한 자리임을 깨달았다.


내 앞자리 매니저님.

그 매니저님의 목소리, 톤, 억양 모두 온전히 그의 것과 같았다. 나는 처음 인사를 나눈 순간부터 마음을 가누기 어려워 죽을 지경이다.

왜 내게 이런 일이. 그야말로 오 마이 갓.



매니저님은 (당연히) 나보다 열살은 더 많으신 연배이고,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배경의 경력을 가진 분이시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딱 그 연배의 좋은 상사 같은 분. 보직이 겹치지 않아, 일을 직접 같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상 너머의 매니저님은 그 자체로도 좋은 분이신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매니저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수긍할 만큼 유사한 톤, 요즘말로 '빼박'으로 똑같은 사투리 억양, 그리고 하다못해 자주 쓰는 단어, 겸연쩍을 때 피식 웃고 말을 흐리는 습관 같은 것도 매우 닮았다. 아마 그 지역 남자들의 보통은 이와 같으리라. 그 보통의 표현일 뿐인 매니저님의 말들은, 나를, 일 하던 나를, 완전히 다른 구석으로 몰고가곤 했다.


바라보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매니저님의 뒷모습을 겨우 쳐다보곤 하는데, 심지어 체형도 비슷한 것 같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내 자신이 문득 두렵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귀자고 했다는 어떤 영화가 떠올랐다. 일본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본 적 없지만, 이 영화는 두 번 정도 본 적 있다. 너무나도 재미있게 봤지만 감정이입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시놉시스가 지나치게 로맨틱하려고 노력한 것 같아서 현대극 같지 않았다. 첫사랑과 닮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그냥' 사귀다니. 뭘까. 에이, 소녀 같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요 며칠, 나는 하루 종일 러브레터가 생각난다.

내가 매니저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매니저님을 겪어보지도 않고, 그냥 후하게 평가하려고 안달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다.


그럴 수 있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한 순간에 사귀자고 할 가능성, 그런거 충분히 있어.



나는 언제쯤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작년 오늘, 그는 우리집 근처를 배회했고, 애써 냉랭한 척 하는 내게 삐져서 돌아갔다. 그리고는 두고두고 '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며 서운해 했다.


얼마 전 그는 (여전히 술의 힘을 빌어) 내게 서운해했다.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사람 얘기를 가지고.


'내가 00보다 못하냐? 걔는 해주고 나는 안 해주고.'

'너가 죽든 말든 내 인생하고 상관 없어.'


나는 마음에도 없는 모진 대답을 했다. 그래야 명확해 질 것 같아서, 피 눈물을 뿌리며.


술만 먹으면 애처로워지는 그가 대답했다.


'나는 너하고 이제 속 깊은 얘기 하고 이런 거 못 하는 구나.'

'응, 다른 사람하고 해.'

'이야, 너무 하네.'


내게 원하는 것이 뭘까.

다시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버리는 것도 아니고, 남들하고 똑같고 싶다가도, 그건 아닌 것 같은지 못 본척 하고.


이렇게 제 멋대로인데, 그래도 받아주고 싶었던 그는 맨정신이 된 이후에는 연락이 없다. 역시 그는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할까.


그는 죽었다.

그는 고인이다.

그는 이제 고인이다.

이렇게 주문을 외우는 동안, 내 앞에 매니저님이 앉기 시작했다. 나는 무척이나 어려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를 어서 만나고 싶다.

어서 다른 곳에 집중하고 싶다.

이 늪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오겡끼데쓰. 쿨하게 한 마디 뱉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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