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니까 하는 말, 기분 좋아 하는 말
빈부격차가 그야말로 넘사벽(?)바리케이드를 쳐버린 남미에서는 잘 나가다가도 황천길, 아니 판타지로 빠지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판타지라기보다는 '마법적 요소, 남미적 마법'이라고 해야 한다던데 어찌되었건 남미 이야기는 그 매체가 소설이든 TV 드라마이든 독특하다.
다만, 마법에 판타지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결론은 쉬우니까. 남미적 표현, 그러니까 magical moment에 익숙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결론을 쉽게 알 수 있다.
신데렐라 해피엔딩.
몹시도 가난하여 고생하던 여자 주인공이 돈 많은 왕자님에게 시집 잘 갔답니다!
이 결론을 보여주는 드라마라면, 팍팍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한 삶에게 한 줄기 미소를 선물해주는 것. 그야말로p '마법의 시간'이 되는 모양.
하긴 열렬히 원해도 될 수 없는 그 무엇을 쉽게 갖도록 해 주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그 덕분에 매번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드라마도 끊임없이 인기를 얻을 수 있나보다. 나 대신 연애해주고 나 대신 시집 잘 가주는 주인공 보는 맛은 늘 좋으니까. 요즘 한국에는 잘 생긴 연하남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덕분에 모두가 '마법의 시간'을 보내는 듯 하다.
바야흐로 봄이 왔다.
지난 주 내내, 본부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며 일했다. 한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 얼른 친해지라고 회식이 줄을 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구석에 앉아 그나마 안면 있던 대리님들과 조용 조용 버티는 시늉을 했는데, 사람들마다 내가 왜 낯을 가리는지 모르겠다며, 자꾸 자리로 다가와 굳이 건배해줬다. 급기야 대표님까지도'너 저기 가서 얘기 좀 하라'고 지령을 내리시도 했다.
왜 나는 여기서도 아마추어 같이 굴고 있나. 새로운 얼굴들과 친해지는 것을 따라다니며 지적하던 상사가 남긴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컸다.
그녀는 내가 누군가와 호의적으로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을 보면, 회식 테이블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테이블을 바꿔 내 앞에 앉은 다음, 건배하는 모든 순간, '얘를 조심해라, 주사가 있는데 말로 전해주기 참 어렵다'고 운을 뗐다. 내가 웃으며 즐거워 보이면 나더러 밤에 가서 일을 해야 하니 그만 마시라고 했다. 없던 일이 왜 생기냐며, 이거 마시고 같이 먹게 봐주라고 누군가 거들면, '어? 얘 좋아해요? 결혼 했잖아요.' 라고 되묻곤 했다. 남아나는 사람이 없었다. 같이 겪은 사람들 중의 몇은 내게 이 회사가 정말 그렇게 좋냐고, 꼭 있고 싶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악몽같은 순간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내게 마법적 요소는 이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죽어라 마시던 술 잔이 어디까지 갔었던가. 누군가 내게 물었다.
"과장님은 눈이 높나봐요."
"하하, 눈이 높아서 노처녀인걸로 하죠, 뭐."
또 누군가 위로했다.
"결혼한 사람들 다 과장님 부러워 해요. 결혼은 두번은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으면 결혼은 안 하는게 좋다고 하던데요."
"인생은 한 번이고, 자기들은 다 결혼해놓고, 뭘 안 한다고 거짓말을 하나요. 하하하."
뻔하고 뻔한 레파토리.
그래도 마음 써 주는 멘트들을 굳이 정색하면서 받아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왜 여전히 쿨하지 못한가. 혼자 낄낄대고 있던 내게 누군가 남자친구에 대해 물었다. 나는 더 낄낄 거리며 말했다.
"저는 진짜 차이는 것도 지겨워요. 굳이 소개팅 안 해줘도 돼요. 지겨워서 뭘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니에요. 과장님 매력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나는 이 말을 건네준 사람을 다시 바라보았다. 떨쳐낼 수 가 없는 말,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우리가 무슨 2인조 공연단처럼 붙어다디던 때, 술에 취한 내가 날 버린 연하남에게 서운해하며, '차이는 것도 지겹다'고 말한 순간. '너는 진짜 매력있어. 그거 잊지마.'라고 했다. 나는 그날 그에게 책임지지 못할 말은 흘리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 그는 아침에 이렇게 말했다. 니가 그렇게 말한 것이 귓가에 맴돈다고. 그리고 내가 매력있다는 말은 진심이라고.
남미 드라마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가 한 말을 똑같이 건네준 내 앞의 남자가 '뾰로롱'하고 그의 모습으로 변하여, 날아오는 것 정도가 좋겠다. 그의 모습이 허락 되지 않는다면, 그냥 비슷한 모습이라도 하나 변신해주는 것이 좋겠다. 내 남자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내게 따뜻한 눈빛을 나눠 주는 장면이 좋겠다. 배경음악은 피아노 솔로가 좋겠다. 우리는 발레단처럼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이 술집 테이블을 경쾌하게 벗어나면 좋겠다. 우리가 누비던 그 거리, 그 거리 어느 하나에 '뿅'하고 떨어지면 좋겠다. 좋겠다. 그가 보고 싶다. 그를 만지고 싶다. 그는 어디에 있나.
마법적 요소가 효용을 다 했는지, 나는 깨달았다. 내 앞의 남자는 그가 아니다. 이 사람은 그냥 내가 '자해공갈단'마냥 '차이기 귀찮다'고 스스로 망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기 괴로워 좋은 마음에서 선한 말을 건넨 것 뿐이다. 이 사람은 그가 아니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벗어날 것이다.
나는 그가 했던 모든 말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나는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으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고,
사실 아무 소용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인생은 현실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마법적 장면으로 삽입해 줄 수 있는 남미 TV가 아니다. 나는 지금 사랑 없는 차가운 도시, 서울에서 회식 중이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8살 많은 남자 괜찮아?"
"응."
"그럼, 8살 어린 남자는 괜찮아?"
"응."
"누구부터 만나볼래?"
"어? 진짜야?"
"어. 정말이지."
"진짜 누가 있나보네, 걱정되게."
" 왜, 막상 만나기는 싫냐?"
그랬다.
막상 만나려니 또 그 긴긴 시간 낯선 방법으로 살아온 사람과 앉아서 합을 맞춰야 할 생각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에게 판타지물이 허락되면 좋겠다. 그냥 에드워드같이 이유 없이 내가 좋다는 뱀파이어 정도 하나 붙여주면 좋겠다. 좋아지기 까지 허무하게 지나가는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
"나 그냥 무생물로 살고 싶어."
"무생물도 짝짓기를 하는 놈이 고등생물이야. 영장류는 이러면 안돼."
"양기가 부족해 보여?"
"어, 너 지금 머리 아프고 어깨 아프고, 그래서 마사지 받으러 가고 하는 이 모든 일이 다 부질 없어. 너가 남자만 잘 만나면 병이 나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누군가에게 또 차일 생각하니까, 이미 고통스러워서 그 어떤 시도도 하기 어려웠다. 그 모래성을 또 다시 쌓고, 한 번의 파도에 모조리 휩쓸려가는 꼴을 쳐다보며 견뎌야 하다니. 그 과정을 왜 반복해야 하는가. 나는 이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때 내 juke box에서 나오는 노래가 나를 흔들었다.
얼음장처럼 추웠고, (freezing)
덕분에 한달내내 콧물이 나도 (sneezing)
다시 한번 센 강에 뛰어 들어가겠다.
(I will do it again.)
죽을 때 까지 나를 괴롭힐 La La Land의 노래 한 구절이 계속 나를 흔들었다.
I will do it again.
아, 이런 순간도 '남미적 마법'이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두렵고, 아무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엠마 스톤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나는 갑자기 두근거렸다.
차일 때 차이더라도,
내 감정에 비겁하지 않게,
온 세상과 너를 바꾸지 않을것만 같이,
우리가 만나는 시간만이 삶의 의미인것처럼,
파도에 휩쓸리면 한 번에 무너져버릴
별 것도 아닌 사랑일지라도,
다시 한 번 해 볼까?
Will I do it again?
마사지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떠는 친구를 만난 길, 봄 바람이 나를 움직였나. 아니면, 내가 눈이 높아 여즉 시집을 못 갔을 뿐이라며 '영업 사원' 멘트를 제대로 날려주던 동료들 덕분인가.
오늘 기분만으로는 난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인생의 마법의 순간은 지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