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life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by Nima

절기는 못 속인다더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다가 어느덧 긴팔을 찾게 되었다.

봄이나 가을이나 습기 없는 바람이 살랑거리면 하는 일 없어도 설레지만, 나는 봄 보다 가을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너무 좋으면 너무 슬픈 것이 인생이라 그런가.

난 가을만 되면 너무 좋은데 슬프다.


이 좋은 공기가 곧 끝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니까.

이 예쁜하늘이 얼마 안간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곧 겨울이 올 것이고, 그럼 나는 또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아, 그럼 또 나는

'왜 여즉 혼자인가, 이렇게 살아 뭐하나, 결국 나는 요모양 요꼴로 가겠구나.'

같은 쓸데없는 비애에 젖을 것이다.


나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 슬퍼하다가

일 하러 나갔을 때는 그렇게 멀쩡한 척하다가.

007도 찜 쩌먹을 두 얼굴 인생, 서른여덟번째 가을이 왔다.

너무 좋고, 너무 슬프다.



회사에서 사원들끼리 옹기종기 커피 줄에 서 있길래, 멋진척 계산해주마고 말했다.

돈 몇 천원 굳는다는 행복감이 꽤나 클 때여서 그런지, 작은 선물 앞에서 다들 수다스러워졌다.

그러다, 한 사원이 조금 멀리 갔다.


"과장님, 주말에는 뭐 하세요?"

"나? 나 그냥 집에 있어."

"에이, 과장님은 절대 집에 안 계실거 같아요. 진짜 자유연애 막 세다리 네다리 하시는거 아니에요?"

"하하하하."


나는 그 말이 꽤나 큰 위로 같았는데, 옆에 서 있던 다른 사원은 제 동료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왜 그랬냐는 얼굴로 눈치를 줬다. 나는 정말 위로 받았는데, 뭔가 나랑 안 어울리는 모양인가.


"그래? 내가 딱 봐도 멋진여성이라는 얘기구나?"

"연하남 3명 4명 막 만나실 거같아요."

"하하하하, 분발할게."


나는 괜히 멋진 척 하며, 그 어린 무리들을 먼저 돌아 나왔다.


연하남이라.

돌아보니, 인생에 연하남이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연하남밖에 선택지가 없다.

나는 참 늙어버린 모양이다.




내 영혼을 지배하는, 브리짓 존스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다소간의 의역 있음)


"그냥 내가 하는 말 무엇이든 신기해하고, 고분고분한, 연하의 남자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도 말이 통하는, 그래도 뭔가를 좀 아는 근사한 남자를 만나 데이트하고 싶어."


나는 그 문장에 줄을 쳐놓기도 했다. 종교를 가진 이들이 성경을 뒤지듯, 그 구절을 다시 찾아읽곤 했다. 너무 외로워서, 아무나 만나버릴까, 맞선 사이트에 가입할까 등등을 고민할때면, 나는 그 구절을 찾아 다시 읽었다.


나는 그냥 있어서 만나고 싶지 않다.

나는 당신이어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산을 넘어가며,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한 순간이 비록 짧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순간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그러니까, 아무나 3명, 4명을 만날 수없다.

(그러니까, 내가 싫어서 안 하는 거지,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 마구 위로한다.)





그러고보니 몇 몇 연하남들이 기억난다.


어릴 때 만난 그는 건설업을 크게 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느라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조숙했는데, 내가 큰 소리로 깔깔 웃으면 늘 이렇게 말했다.


"너는 다 좋은데, 그렇게 잘 웃어주지마. 너 사람들이 쉽게 볼까봐 두렵다."

"웃지 말라고?"

"아니, 나한테는 웃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웃어주지 말라고. 착해보이지 말라고."


그와 헤어진지 정말 오래되었지만, 나는 가끔 그 시절 그가 그렇게 조숙했던 것이 놀랍고, 그의 지적이 꽤나 오래도록 쓸만하다는 점이 놀랍고, 그 오랜 시간동안 그 버릇을 못 고치는 내가 놀랍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또 한 사람 기억난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는데, 아주 고고했고, 일이 없는데, 말은 여유롭게 했다. 나는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며 오지랖 부리고 착한 척하다 못해 그를 들들 볶았는데, 주로 그에게 일자리를 알아봐주는 류의 오지랖이었다.


그는 손사래쳤다.

나는 몸이 달았다.


"나 이용하면 안돼?"

"그만하자."

"왜? 그냥 이용해. 눈 한번 딱 감고."

"야. 너는 너 이용하는 남자가 좋니?"


나는 오래도록 그 순간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왜 잘난척이었나. 왜 그를 괴롭게 했나. 내가 뭐라고. 내가 뭔데. 왜 그에게 오만을 떨었나. 왜 그냥 여자로만 있질 못했는가.


비슷한 기억들이 쏟아지면서, 나는 또 익숙한 생각의 고리에 빠져들고 있다.

왜 나는 그 따위였나.

왜 나는 그 정도밖에 못 했나.

그러니까 여즉, 아직도 요모양 요꼴이지.



저한테 프로젝트가 올까 싶어 그랬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그는 내가 다른 이와 일한다는 점을 꽤나 불쾌해했다. 나는 그에게 너랑 상관 없는 일이라고 누차 말했고, 그는 내게 신경 안쓴다고 누차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크게 짜증냈다.


"다시는 나한테 뭐 묻지마."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침묵한 것이 괴로웠는지, 그는 이틀 뒤 또 전화했다.

나는 두 번다 받지 않았다.


한참을 모른척 하다가, 다시 카톡에 대꾸를 했는데 그는 정말 제 친구부탁을 들어주려 내게 뭔가 물었다. 저에게는 뭐 묻지 말라고, 일 줄 거 아니면 묻지 말라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부부도 아니면서 맞춰주는 것이 맞나 고민되었지만, 일단 대충 대답하고, 좋은 사람 알아보라고 했다. 그는 대꾸가 없었다.


나를 따라한 것인가. 유치하긴.

웃기기도 하고, 궁금해서 어떻게 해결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성의가 없어서, 결과를 알려줄 필요가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가만히 듣자하니, 화가 끌어올랐다.


"나는 너한테 성의있을 필요가 없어."

"알았다."

"나는 너 직원도 아니고, 니 와이프도 아니고, 난 의무가 없어."

"알았다고."

"앞으로는 너 아무것도 묻지마."

"알았다고. 그만해라."

"나는 너를 위해 뭘 해줄 사람이 아니야. 남남이야. 그러니까 매너지켜. 난 너를 다시 차단하거나 하지 않을거야. 그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 그냥 너는 1년 내내 연락 안하는 카톡 목록의 하나이다가, 번호가 바뀌면 없어질 남이야."

"어이가 없네. 내가 차단해줄게."

"마음대로 해."


이렇게 카톡으로 불을 질러둔 나는 출근하는 아침에 이렇게 보냈다.


"잊지마. 나는 너의 인맥이 아니야. 너랑 나는 남이야."


오후 언젠가 잠시 다시 들여다 본 카톡에서, 숫자 1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야기 한적 없다.


그게 지난 주의 일이다.



무지하게 바쁘긴 했지만, 그렇다고 글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다시 브런치에 로그인하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오래도록 헤어나오지 못한,

내가 정말 깊이 사랑했던 사람.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괴롭지만 너무 행복했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의 바닥을 본 것같기도 하고, 나의 바닥을 본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굳이 날카롭게 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다가도,

굳이 그를 감싸고 돌면 내게 뭐가 남는가 싶고.


결국 나는 이따위구나.

내게 사랑이 웬말인가. 그런 사치가 가당키나 한가.

나란 사람은 그냥 무생물처럼, 삼시세끼 챙겨먹으며, 때 되면 출근하고, 때 되면 집에오길 수 해 반복하면서,그렇게 늙어죽으면 될 일이지. 나는 왜 그런 몹쓸 꼴까지 봐가며 살아야 하나.


나를 책망하고

나를 원망하다보니,

어느 덧 9월이다.


너무 좋은데, 너무 슬픈 가을밤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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