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시금치보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란 섬초가 맛있는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요맘때 섬초를 보면 할머니가, 할머니가 해준 섬초 무침이 생각난다.
겨울에 해풍을 맞고 자라 달달한 섬초는 일반 시금치보다 맛도 좋고, 무기질도 풍부해 겨울철 영양 보충에 탁월하다.
섬초가 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잎에 있는 수분을 줄이고, 당분을 축적한 결과이다.
맹물보다 어는점이 낮은 설탕물의 원리를 이용해 겨울을 견뎌내는 것이다.
섬초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견디느라 땅바닥에 쫙 붙어산다.
위로 길게 자라면 찬 바람에 얼어 죽거나 줄기가 꺾인다.
그래서 잎을 방석처럼 펼쳐서 땅의 온기를 품고, 햇빛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방사형으로 잎이 나는 식물을 로제트 식물이라고 한다.
잎이 난 모양이 마치 장미꽃 같다 하여 로제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냉이, 민들레, 엉겅퀴, 질경이 등도 로제트 식물에 속한다.
섬초와 같은 로제트 식물들은 살기 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그런 섬초를 보고 과연 비굴하다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예전에 친척들과 모여 카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카페에는 문신을 한 조폭들 무리가 앉아있어서 내심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뭐 별일이야 있겠어하고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클러치백으로 내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무조건반사로 '아' 소리가 나왔다.
가족들은 그 소리에 놀라서 나를 쳐다봤지만, 정작 나를 치고 간 그 조폭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갔다.
그리고 나와 가족들도 잠깐의 정적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그 조폭은 클러치백으로 나를 친걸 못 알아챘을 수도 있다.
내 말을 못 들었을 수도 있다.
(굳이 굳이 다른 편한 길 놔두고 내 뒤로 지나간 것도 이상하고, 내 소리가 그리 작지 않았지만 그래도 뭐..)
그날 밤까지도 나는 불쾌했다.
뭐 나를 쳤다는 이유로 큰 사과를 받거나, 큰소리를 냈을 건 아니다.
다만 조폭이라는 이유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깨갱한 내가 너무 비굴해 보였다.
뭣도 아닌 것들에 쫄아버린 내가 싫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도 내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때 나와 우리 가족의 반응이 가장 적절하지 않았나 싶다.
상식 수준이 다른 사람과 엮이는 건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다.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섬초처럼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또 어떤 이 앞에서, 어떤 상황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분하다고 이불킥 하는 게 아니라
그게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시기가 내 안에 당분을 축적하듯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독한 겨울바람 앞에선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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