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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08. 2021

우리를 정화할 수 있는 것

1일1드로잉, 주방 타이머

#115일차

*2021.11.8. 10분 글쓰기*

요리


요리를 잘 못하고 요리하는 재미를 잘 모른다. 음식 할 때 간은 맞출 줄 아는데 불 조절은 젬병이다. 볶는 것은 괜찮은 편인데 삶는 것은 시간을 잘 못 맞춘다. 손목 스냅으로 팬을 흔들어 재료를 뒤섞는 것은 잘하는데 나물을 삶으면 언제나 너무 익혀 실패에 가깝다. 요리는 의무적인 일에 속해서 질이 없어도 크게 아쉬움이 없다.


요즘은 살림꾼들의 블로그나 유튜브 레시피가 워낙 잘 되어 있고 세상 모든 요리의 레시피가 담긴 듯 인터넷 정보량도 방대하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까다로운 요리도 구현해낼 수 있다. 먹고 싶은 요리 이름을 검색하면 준비할 재료나 손질법, 양념 순서 등 전부 나와있다. 글자를 읽을 줄만 알면 어린이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세하다. 내비게이션이 워낙 발달해서 운전자들이 모두 길찾기 프로그램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는 지도 읽는 법이나 지형을 살피며 본능적으로 길을 찾는 능력이 퇴화된 것처럼 요리도 비슷해지는 것 같다. 식재료의 모습을 살피고 냄새를 맡고 특성을 파악하며 불에 익힐지, 물에 삼거나 찌는 게 좋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간장, 된장, 고추장 어느 게 어울릴지 고르고 주재료와 궁합이 맞부재료를 생각해서 선정하않는다. 그저 레시피를 따라 하며(특히 백종원 레시피) 숙제 해치우듯이 하는 것이다. AI처럼 표준화된 매뉴얼이 시키는 대로 평균치 맛을 흉내 낸다. 이쯤 되니 앞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정성이 담긴 생명이 깃든 음식재료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와 다르게 남편은 불 조절이 기가 막히다. 평범한 고깃덩이도 남편이 구우면 호텔 스테이크처럼 근사해진다. 나처럼 죽이 되지 않게 나물 삶는 것도 잘해서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을 살리면서 풋내만 사라지는 타이밍을 귀신같이 잡아낸다. 타이머의 도움 없이도, 계량스푼이나 요리 레시피 없이도 뚝딱뚝딱 잘 해낸다. 그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는 작은 차이에 있었다. 내가 몸에 익은 방법대로 사물을 보고 앎에 의지해 정보를 처리한다면 남편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항상 새롭게 바라본다. 나는 레시피대로 움직이고 타이머가 울리면 뒤집는데 남편은 자신이 먹어본 경험을 살려 고기나 생선의 색깔과 모양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요리한다. 조리과정이 빨라야 음식 맛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센 불로 빠르게 요리의 종료를 향해 달려간다면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중간 불과 약불 사이를 오가며 재료의 변화에 집중한다. 스타일이 이렇게 다르지만 서로를 보완한다고 생각하니 요리하는 것만 봐도 이래저래 잘 만난 것 같다.


김종제의 시 <마음에 사랑을 담그는 법>을 읽었다. 동치미를 담글 때 무를 다듬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 상처가 심해서 검게 변한 곳을 어루만져준다. 우주 같은 항아리에 담듯이 커다란 사랑으로 그의 존재를 가득 품는다. 미묘하게 다른 그와 나의 차이를 발견하면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달라서 좋고, 다양해서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신호로 읽는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계는 불순한 생각을 없애는 것이다. 정화 효과가 있는 숯을 넣으면 더러운 것이 깨끗해져 결코 이별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연인이나 가족, 부부, 부모 자식 사이에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갈 때 숯을 대신해 순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꾸 바닥으로 꺼지는 눈길을 들어 올려 드넓은 푸른 하늘을 멀리 내다보는 습관, 윤동주가 말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 삶의 방향성, 나는 누구인가 존재 대한 철학적 물음, 죽음이 언제나 삶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하는 현명함, 어차피 죽게 되어있는데 오늘 하루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나름의 대답, 우주를 그리워하는 마음, 나의 풍요와 편안함은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결핍과 어려움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겸허한 태도와 비슷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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