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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10. 2021

당신을 넣어두는 집

1일 1드로잉,  안경집

#116일차

*2021.11.9. 10분 글쓰기*

그동안 살았던 집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집들은 모두 거쳐가는 느낌을 주었다. 지금 집도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잠시 동안 머무는 임시 생활공간으로 여겨진다. 이 집을 고를 때도 이틀 고민하다 계약했고 살림을 채울 때도 기능과 역할에 충실한 것들로 선택했다. 실용적인 목적이 1순위 기준이었으므로 내가 사는 집은 풍부한 감성이나 낭만을 자아내기 어렵다. 삶의 필수요소인 의식주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으며 자산 축적 수단으로 최고인 집이 내 앞에서 이토록 축소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가 소유가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내 삶의 태도가 그렇다. 현재를 미래에 저당 잡히고 행복의 파랑새는 앞으로 올 시간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막연히 미루는 경향이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인하고 이상적인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가올 시간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단속하고 유혹을 경계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금욕적인 생활인에 가깝다.


안정적으로 정주할 집이 생기면 그 집과 나는 유기적으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날의 기분이 집 안의 여러 공간에 영향을 받고 나의 내면 심리가 페인트 색이나 가구에 반영되는 것을 상상하면 설렌다. 집터부터 골라서 새로 지어 올리거나 구옥을 사서 내 스타일대로 개축하여 살 것을 계획하고 있다. 햇빛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마당과 야외 밥상, 선룸, 테라스, 팬트리, 아일랜드 식탁, 창가 의자, 개집, 고양이집, 창고, 차고, 작업실, 서재 등 집의 구조에 대해서는 분명한 그림이 있다.


집이 놓일 자리는 아직 막연하다. 자연으로 둘러싸여 이웃집이 그리 가깝지 않은 촌락이 될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시골 텃세가 장난 아니라는 말이나 옆집을 잘못 만나면 고생한다는 말을 들으면 흔들린다. 시골은 밥상에 놓는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안다는 경고 아닌 경고에 안정적인 집이 또다시 미래로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지인들은 너는 절대 시골에서 못 산다며 장담할 때마다 괜한 오기가 생기곤 했다. 설마 정말 그럴까, 어디나 사람 사는 비슷하다고 손사래를 치면 도시의 익명성이 공기처럼 서울 토박이인 너를 휘감고 있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 그런다고 코웃음 친다. 양보해서 4도 3촌-4일은 도시에 살고 3일은 촌락에 사는 두 집 살림을 해볼까 싶어 두 마리 토끼를 다잡는 욕심 많은 대안을 검토 중이다.


오늘의 주제인 '집'에 맞게 그림을 그리려고 보니 안경집이 보였다. 안경집 외에도 칼집, 가위 집, 총집이 있다. 여기서 집은 총, 가위, 칼, 안경 등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넣어두는 물건이다. 달팽이집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다치지 않게 안전하게 넣어두는 집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금성은 태양계에서 지구에 가장 가깝고 달 다음으로 밝은 별이라 이름도 여러 가지다. 새벽 무렵에 뜰 때는 샛별, 새별이라 부르고 저녁 무렵에 뜨면 장경성이라고 불렀다. 로마에서는 미의 여신 비너스라고도 부른 금성을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라고도 한다. 개밥바라기는 개밥그릇이란 뜻인데 저녁 무렵 개에게 밥을 주느라 개밥그릇에 고개를 숙이면 서쪽 하늘에 걸쳐 보였기 때문이다. 박형준의 시 <개밥바라기>를 읽으며 노인과 개 단둘이 사는 허름한 시골집이 떠오른다. 노인과 개는 따로는 굳세게 서지 못하고 서로를 비스듬히 기대어야 바로 설 수 있다. 병환으로 집을 떠나 있는 노인은 너무 오래 누워있어 침대 가운데가 푹 꺼졌다. 초저녁 창 밖을 바라보며 집에 두고 온 개를 떠올린다. 저녁밥 주러 나오는 주인의 발소리만 기다리고 있을 허기진 개가 걱정된다.


깊은 밤에 읽은 <개밥바라기>는 김애란의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을 데려왔다. 암에 걸린 에반을 안락사시키기 위해 찬성은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핸드폰 때문에 그 돈을 조금씩 허물게 된다. 영화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줄 케이크를 조금씩 손대다 전부 먹어버리게 된 소년도 겹쳐 보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욕망 앞에 비굴해질 때가 있고 죄책감과 뻔뻔함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타인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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