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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14. 2021

컴퓨터, 연필, 노트북

1일 1드로잉, 새우만두

#121일차

*2021.11.14. 10분 글쓰기*

글쓰기 도구의 역사


내가 중학생일 때 큰언니가 대학에 입학하며 집에 컴퓨터가 생겼다. 컴퓨터 책상에 앉아 브라운관 TV 같은 두꺼운 모니터와 자판기를 앞에 두면 세련된 직장인이 된 기분이었다. 전원을 켜서 우주처럼 검은 화면이 열리면 초록색, 빨간색 글자가 떴다. 언니의 어깨너머로 외워둔 스파이 암호 같은 명령어를 입력하면 도스 컴퓨터가 파란 화면으로 바뀌고 하얀 커서가 깜박였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타자연습 밖에 없었지만 컴퓨터를 사용하면 문명의 첨단 대열에 서있는 것처럼 신기하고 스마트 해지는 느낌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리포트 숙제를 작성하며 글을 쓰는 데 컴퓨터를 많이 사용했다. 프린터기가 집에 없어서 플로피 디스크에 파일을 담아 학교 가서 출력했다. 전산실은 도서관 1층 오른쪽에 있었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무료 이용하는 곳이 늘 그렇듯 관리가 안되어 프린터기에 "고장"이 써 붙어있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는 지하철 교대역으로 전력 질주해서 킹코스를 찾아 장당 몇 백 원 주고 과제를 출력했다.


난감했던 일은 전산실 컴퓨터에 앉아 플로피 디스크를 넣었는데 오류가 나서 작성한 파일이 열리지 않을 때였다. 분명 집에서 여러 번 잘 담긴 걸 확인했는데 가방에 담아오면서 자석에 닿은 건지 흠집이 생긴 것인지 학교 컴퓨터에서는 열리지 않았다. 진땀을 내며 플로피 디스크를 넣다 뺐다 하는 무의미한 짓을 반복할 뿐 과제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에 파일을 하드에 저장하지 않고 플로피 디스크에만 저장하며 썼던 날도 있었다. 그러다 A4 5페이지에 이르는 긴 리포트를 통째로 날린 적 있는데 허무해서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음밖에 안 난 일이 기억난다. 지도교수님께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심란할지 알겠다며 다시 쓰도록 기회를 주셨던 고마운 일도 있었다.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대학원을 다니고부터다.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대학원은 글 쓰는 기회를 주는 곳이란 걸 알았다. 용산에서 조립한 데스크톱 컴퓨터를 쓰고 있었는데 바이러스를 먹어 대학원 다니며 썼던 글이 거의 다 사라졌다. 하드디스크도 불안해서 외부 저장장치에 백업을 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컴퓨터로 글을 쓰기 전에는 연필을 주로 사용했다. 한번 쓰면 지우기 힘든 펜과 달리 부담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볼펜보다 미끄러지듯 써지는 느낌도 글을 쓰는 마음을 가볍게 했다. 연말이 가까워오면 서점이나 대형 문구점 가판대에는 수많은 종류의 다이어리가 전시된다. 나이가 들수록 10대에는 10km로, 40대에는 40km로 나이의 앞자리만큼 시간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말의 의미를 같다. 지금은 1년하기엔 짧게 느껴지지만 그때만 해도 1년은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이룰 있는 시간 단위였다. 새해를 앞두고 어떤 일기장을 고를까 고민하는 일로 마음이 설렜다. 핸드폰이 스마트해지면서 점점 글쓰기에 소홀해지고 다이어리에 공백으로 남은 페이지가 늘어났다. 매년 고르는 다이어리가 점점 작아지고 두께도 얇아지더니 몇 년 전부터는 아예 다이어리를 사지 않게 되었다.


일기 쓰기나 지금 쓰는 것처럼 짧은 길이의 글보다 긴 글을 써보고 싶다. 장편 소설이나 긴 목차를 갖는 글을 쓴다면 노트북을 즐겨 이용할 것이다. 지금 쓰는 노트북은 2년 전에 글쓰기용으로 마련했다. 다양한 장소에 들고나가 글을 쓰고 싶어 가벼운 것에 유념해서 골랐는데 어쩌다 보니 매일 저녁 집에서 마주하고 있다. 문서작성기능만 생각해서 사운드 수준이나 화질 면에서 최고급 사양을 선택하지 않았는데 코로나가 닥치면서 줌 회의용으로 자주 쓰고 있다. 이제는 본래 의도대로 노트북을 들고 여러 장소를 찾아 글 쓰는 데 사용하고 싶다.


캠핑장에 가서 통나무 의자에 앉아 이슬을 거두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글이 풀어질까 궁금하다. 천장이 높은 카페나 숲 속의 도서관, 야외 테라스가 있는 여행지의 숙소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상상해본다. 태국 여행 중 아유타야에서 숲 속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문 적 있다. 층고가 높은 2층 방에는 높이가 꽤 있는 싱글 침대 3개가 놓여있고 침대마다 머리맡에 긴 직사각형의 격자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열면 생명력 넘치는 넝쿨 식물과 덩굴로 눈앞에 연둣빛 풍광이 펼쳐졌다. 그 정원에 놓여있던 테이블에 앉으면 거리낌 없이 나 다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장소에서 깨어있는 정신으로 글을 쓰면 글쓰기의 본령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는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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