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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27. 2021

폭설의 교훈

1일 1드로잉, 배춧잎

#134일차

*2021.11.27. 10분 글쓰기*

첫눈, 폭설, 눈사람...


여기가 전쟁터라면 백기를 들기 전이었다. 정든 작업실을 정리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그해 겨울은 참담했다. 안색이 어두워 흙빛이 된 그의 얼굴은 볼이 푹 꺼지며 말라갔다. 십 년의 세월과 그보다 길었던 열정이 묻은 집기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그를 보았다. 빨래처럼 쥐어짠다면 몸이 눈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작업실 방마다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올 때 우리는 한때 전부였던 세계가 닫혔음을 느꼈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오후부터 내리던 눈발이 조금 굵어진 것을 보았다. 차 안에 타고 있는 말 없는 우리처럼 차 밖의 눈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라디오 소리가 간신히 흐르고 있었다. 잠깐 사이 눈발은 거세졌고 도로 위 차들의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올렸지만 눈 내리는 속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지 못해 눈앞이 하얗게 흐렸다. 눈은 순식간에 불어나 도로가 기다란 주차장으로 변했다.


12월의 마지막 날에 내린 폭설은 강한 추위로 도로에 닿자마자 얼음이 되었다. 오르막 경사에서 차들이 미끄러지며 여기저기서 부딪쳤다. 비상등을 켜고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틀며 엉켜 든 자동차로 차선이 사라졌다. 갓길에 버려둔 차들이 늘어나며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사고 없이 집에 도착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라고 빌었다. 오늘 밤이 가기 전에 따뜻한 방바닥에 손을 넣고 얼은 몸을 녹이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웠다.


소방서에서 나온 대원들이 염화칼슘을 뿌려주고 경찰관들이 유도등으로 어질러진 차들을 빼내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개미만큼 조금씩 움직이며 위기를 벗어나는데만 집중하는 동안 처참한 실패로 괴로운 마음을 잊었다. 폭설이 생존 욕구를 찾아주며 위험한 고비를 넘기는 비법은 단순한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 훈훈한 온기로 몸의 긴장이 풀렸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베란다 밖으로 도로 상황을 살폈다.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가 빠져나온 그곳에 거북이처럼 슬금슬금 움직이는 차량이 보였다. 저 차 안의 사람들이 오직 바라고 있는 것은 내가 머물고 있는 안온함일 것이다. 차 안에서 품었던 마음으로 살다 보면 지금의 실패담을 평온하게 나눌 때가 올 거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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