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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12. 2021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는 일

1일 1드로잉, 고양이는 옳다

#88일 차

내가 좋아하는 것들


빈 방을 좋아한다. 25제곱미터 크기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방에 들어간 적 있다. 스님은 그 방을 너의 마음이다 생각해보라 하셨다. 사면에 뚫린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형광등 없이도 방이 환해졌다. 열린 문으로 숲이 보낸 청아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렸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글을 쓰고 등 대고 누워 잠을 잤다. 둥글게 앉아 밥 먹고 툇마루에 앉아 명상했다. 빈 방에서 핸드폰 없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많이 웃으며 부족함이 없었다. 한가로운 시간을 지내며 동작이 느긋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았고 하고 있는 일에 몰입이 잘 이루어졌다.


아까워서, 불안해서, 남들도 다 있어서, 편하다고 해서, 하나 둘 챙기다가 물건으로 가득 찬 집이 떠올랐다. 생활이 괴로워서 깊은 산속까지 찾아왔는데 방을 비우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는구나. 속세로 돌아가면 반드시 짐을 들어내 몽땅 버리리라 다짐했다. 빈 방이지만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날마다 머리카락과 먼지, 작은 쓰레기가 생겼다. 마음에 가득 찬 오래된 가구와 큰 짐을 덜어내도 매일 찌꺼기를 청소해야 깨끗하고 맑은 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호텔의 정리된 침대와 책상, 욕실을 좋아한다. 락스 냄새에 코를 막고 타일 사이에 낀 곰팡이를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 얼굴과 팔이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며 수챗구멍에 낀 머리카락 뭉치를 빼지 않아도 되어 좋다. 내가 청소하지 않아도 새햐얗게 윤이 나는 변기가 사랑스럽다. 개수대 하수구 망에 모인 음식물쓰레기를 비우지 않아도 되어 행복하다. 문고리에 MAKE UP ROOM을 걸어두기만 하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외출 후 돌아오면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흡족하다. 우렁각시가 다녀간 후 새 얼굴을 한 방을 보면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것처럼 설렌다. 뻣뻣하고 서걱거리는 침대 시트와 세제 냄새, 두툼한 샤워가운도 좋아한다. 내 마음 안에는 산사의 빈방과 도회적인 호텔이 뒤섞여 있다.   


추운 날 집을 향해 총총 걸어와 문을 열었을 때 따뜻한 온기로 몸이 녹는 순간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한옥에 살아서 방바닥은 뜨끈하고 공기는 차가운 것이 좋다. 온풍난방은 건조하고 공기가 탁해지는 것 같아 답답하다. 젖은 걸레로 금방 훔쳐낸 방바닥의 감촉을 좋아한다. 촉촉함이 남아있어서 맨 살이 닿았을 때 발바닥을 살짝 잡아당겼다 떼느낌을 좋아한다. 바닥이 돌로 덮인 길을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한다. 적적하고 쓸쓸한 길을 또각또각 걷고 있는 내 존재를 알려주는 명쾌한 구두 소리가 좋다.


내 발에 잘 맞아 오래 신어도 아프지 않은 신발과 몸에 잘 맞는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몸, 신체 사이즈를 잘 알고 그에 맞는 옷을 선택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가능한 능력이다.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오래전 영국 영화가 생각난다. 어릴 때 입양된 흑인 여자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친모를 찾는 내용인데 줄거리보다 주인공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젊고 지적인 호텐스는 차분하고 평온한 성품으로 정돈된 일상며 그윽하고 담담한 삶의 태도를 가진 여성이다. 키가 작고 다부진 몸매, 고수머리의 그녀는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녀의 매력은 자신의 몸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 자기 아닌 것으로 정신없이 삶을 채우지 않는 데 있었다.


필요한 것만 사는 것을 좋아한다. 1+1 판촉 행사, 끼워 팔기, 덤으로 얹어주는 게 싫다. 묶음 배송의 유혹에 쓸려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다가 모두 삭제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다음에 살 집은 설계부터 작은 소품까지 좋아하는 것만 남기고 채울 것이다. 필기감이 좋고 섬세한 연필과 펜으로 연필꽂이와 필통을 채울 것이다. 프라이팬과 솥, 요리 연장도 재질을 고려하여 골라올 것이다.


길 고양이도 가족으로 맞아들일 것이다. 어릴 때 동생이 친구 집에서 강아지를 받아왔다. 그렇게 가까이서 동물을 본 적은 처음이라 강아지의 모든 것이 선명했다. 강아지는 새로운 환경이 쑥스러워서 구석을 찾아 모로 누워 궁둥이만 보이고 있었다. 늦게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역정을 내시며 애새끼도 다섯이나 돼서 힘든데 저 생명까지 거둘 수 없다며 엄마든 강아지든 둘 중 하나 택하라고 할 때 진심으로 강아지를 선택할 뻔했다. 반려동물을 키워 본 적 없는 나는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과 열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극세사 이불 속에 들어가 머리 끝까지 덮는 것을 좋아한다. 주름을 만들어 손끝으로 만질 때 감촉을 좋아한다. 아침에 잠을 깨도 이불속에서 주름을 만지작대느라 그대로 누워 있을 때가 많다. 찬바람 솔솔 부는 요즘 같은 가을날 이불속에 폭 들어가 있는 느낌이란 그 순간만큼은 억만금을 줘도 아깝지 않다.  

기차를 타고 갈 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크기와 속도를 좋아한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 나 혼자 기차 안의 사람들과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나온 기분이 든다. 비 오는 날 버스 속도에 의해 사선으로 점점이 흘러내리며 버스 창문에 맺히는 빗방울을 좋아한다.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 그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서울의 야경, 한강 다리를 건널 때의 운치를 좋아한다. 한강은 도도하게 흐르고 가장자리는 자동차 후미등의 빨간 불빛이 가득 매운다. 어스름 저녁, 한강변 아파트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면 시야가 아득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세상과 연애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대상에 대한 나만의 이해와 긍정, 마음을 움직이고 이끄는 정도를 느끼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얼마큼 받아들일 수 있고 나에게 맞는 것인지 생각하려면 세심한 관찰력과 소통하는 힘이 필요하다. 방구석에 앉아 손가락 몇 번 두드리면 당일 배송, 새벽 배송되어 물건이 하찮아진 세상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고 가르는 능력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고양이는 옳다> 시를 좋아한다. 고양이는 추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가장 따뜻한 지점, 먹을 것이 있는 위치를 기억한다. 고통을 안겨주는 장소와 적들이 있지만 생선의 맛과 우유를 핥아먹는 기쁨을 기억한다. 고양이는 본질적인 것을 기억하고 그 외의 것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그래서 너무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하느라 심장에 금이 가는 우리들보다 고양이는 더 깊이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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