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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0. 2021

미래를 위한 준비물

1일 1드로잉, 좋은 나

#96일차

오늘은 강남 서초 지역에 계신 선생님들을 위한 일주일간의 연수를 마치는 날이었다. 처음 연수를 준비할 때, 대한민국에서 강남구, 서초구가 갖는 위상으로 미루어 그곳 선생님들이 차갑고 도도하고 까다로울 거라고 예상했다. 연수를 가면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봐. 네가 얼마나 알고 있어?" 하는 태도가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 앞에 서면 굉장한 에너지와 도전을 받게 된다. 그런데 웬걸, 다른 지역보다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선생님들 모습에 놀랐다. 학부모 관심도가 높고 민원이 많아서 선생님들도 준비하는 진지함이 다른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번 연수는 오후 4시에 시작해서 6시 10분에 끝나는, 선생님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퇴근 시간과 저녁식사 시간에 하는 "회복적 생활교육 관계 회복 전문가 양성 과정"이었다. "전문가"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이 있지만 교육청의 의뢰를 받은 연수라서 기관의 요청을 수용하게 된다. 연수 이름도 유행이 있어서 요즘 연수 제목엔 전문가, 심화 과정, 리더십, 역량, 강화라는 말이 들어간다. 연수 이름만 들어도 피곤해지고 참여 의욕이 꺾인다. 리더십과 전문가가 없어 학교가 힘들었던가?


비대면 화상회의로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벌써 2년 차에 접어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랜선으로도 아이들을 안타까워하는 선생님의 마음,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는 위로가 전해진다. 원래 당연했던 자연스러운 모임을 이제는 "대면"이라는 별도의 명사를 덧붙여 "대면만남"이라고 명명하게 되었으니 코로나19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예전 같으면 따뜻한 차를 나누고 선생님들과 손 잡으며 다음 만날 날을 기약했을 연수 마지막 날이 빨간색 종료 버튼 "회의 나가기"로 대신하게 되었다.


"따뜻한 차 한잔" 에는 "마신다" 보다 "나눈다"는 동사가 어울린다. 함께 차를 나눌 내 앞에 앉은 좋은 사람이 그립다. 최대호의 <준비물> 시를 읽다가 뒤통수를 때리는 깨달음을 얻었다.



준비물

-최대호


좋은 일

좋은 사람

좋은 삶을 만나려면

간단한 준비물이 있다.


좋은 나



시인은 간단하다고 했는데 '좋은 나'가 되는 일은 아득히 멀어 보인다. '간단한 준비물'이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어떤 일을 해도 좋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다 좋고 어떤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한 것이겠지. 내 마음이 지옥이면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살아도 참을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질 것이다. 오래전 미국에서 재벌 회장의 막내딸이 선택한 안타까운 죽음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내 마음이 봄날이면 어떠한 외적인 악조건도 무릅쓰며 생존 의지가 끓어오를 수 있다.


유태인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열차의 창살 너머로 석양빛에 빛나는 산 정상을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체험했다. 수용소 포로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극대화하여 자기 존재의 공허감과 고독,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달아났다. 집으로 가는 버스, 따뜻했던 아파트, 평범했던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억해내고 상상 속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하며 과거를 피난처 삼았다. 노역을 하느라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 수프 한 그릇을 들고 있는데 한 동료가 달려와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고 소리쳤다. 다들 점호장 밖으로 나가 빛나는 구름과 붉고 푸르게 변하는 하늘을 보았다. 초라한 막사와 대조를 이루는 자연을 보고 모두들 감동으로 잠시 침묵했을 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2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의사의 본분으로 돌아간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바탕으로 로고 세러피라는 정신치료법을 만들었다. 로고테라피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는 니체의 말과 뜻이 통하는 이론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주된 욕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데 있지 않고 삶에서 의미를 찾는 데 원초적인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삶의 의미는 포괄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삶에서 갖게 되는 고유한 의미를 뜻하며 인생의 문제에 봉착할 때 자신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지 책임을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책임과 삶의 의미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회복적 서클의 철학과 공통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세 가지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하는 일, 둘째는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자연에 대한 경험과 사랑하는 사람, 셋째는 시련을 대하는 태도이다. 일부러 시련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 시련에 불가피하게 처했을 때 고난의 의미를 헤아리는 과정에서 평생 가져갈 수 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하니 집 앞에 택배 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주문한 티 세트가 도착했다. 스트로베리, 히비스커스, 호박차, 호박팥차, 유자차가 있어서 앞으로 반년 동안은 매일 저녁마다 따뜻한 위로 한 잔 스스로에게 대접해줄 수 있게 되었다. 찬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오이지무침과 먹고 나니 유자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훗날 기후위기나 외계인 침공, 운석 충돌, 화산 폭발, 대지진, 3차 세계대전, 핵전쟁, 테러 등으로 내가 조난당하거나 수용소에 갇힐지 모른다.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삶을 맞이할 수도 있다. 앞날을 미리 준비해서 고유한 나만의 추억을 세세하게 지어놓아야겠다. 오늘 저녁의 차 한잔도 그중 하나에 들어갈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두 번째 방법인 사랑, 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정도로 깊이 그에게 몰두하는 일에도 노력해야겠다. 빅터 프랭클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내를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그녀의 목소리, 시선, 미소를 생생하게 그리며 수용소 생활을 견뎠다.


어떠한 어둠이나 권력자가 등장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경험을 쌓아가야겠다. 쉬는 시간에 가벼운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 길가에 핀 꽃에 감탄하기, 노을 지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내 옆에 잠든 이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첫 마음을 다시 떠올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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