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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Apr 10. 2023

당신의 문을 연 사람은 누구인가요?

[활자중독일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의 장편 소설 ‘도어’


# 혈연도, 성적 끌림도 아닌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

#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문을 열었던 순간

# 질곡있는 헝가리의 근현대사


‘시절인연’ 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조금은 안도했다. 한 시기를 같이 한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니 그런 위로가 또 어디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는 영원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쉬웠던 관계들을. 지난 인연을 보내주는 법을 배우며 우리는 성숙해지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절인연’과 다르게 끝없이 이어지는 관계도 존재한다. 이는 주로 누군가의 존재가 나의 마음 안에 머물기 시작했을 때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가 마음에 자리 잡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운명적으로 뒤엉켜 있으며, 예측 불가능한 감정인지!’(163).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의 소설 ‘도어’에는 두 여자가 나온다. 한 명은 고용인이고, 한 명은 피고용인이다. 작가인 ‘나’의 집안일을 ‘에메렌츠’가 도와주면서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살아온 시대도 다르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도 없어 끝없이 부딪치면서도 두 여자는 20여 년 동안 관계를 이어오게 된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의 관계를 이어가게 될까. 피를 나눈 가족을? 성적 끌림이 있는 상대를? 아니면 가치관과 취향이 맞는 상대를? ‘나’와 ‘에메렌츠’의 관계는 이 중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둘은 서로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공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존재.


어떻게 그 둘은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이는 아마도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한 갈등 끝, 상대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인정해 주었을 때 둘의 관계는 한층 깊어진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상처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과도 같다. 상대에게 기꺼이 나를 찌를 수 있는 칼자루를 넘겨주는 행위. 그랬기에 그 둘은 특별한 관계가 되었고, 에메렌츠는 죽음을 맞이한다..!!!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라고, 자책하는 ‘나’에게 아마도 에메렌츠는 말할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고’ 자신이 분명 말했다고, ‘참고해 두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이미 말한 바 있지 않냐고 말이다. (그녀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이들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에메렌츠의 죽음을 스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의 죽음은 첫 장에서 나오니까.)


책을 읽고 나면 ‘나’가 왜 에메렌츠를 ‘여름에는 첫 번째 체리였고, 가을에는 영근 밤, 겨울에는 화톳불에 익힌 호박, 봄에는 관목의 첫 봉오리였다.(282)’고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에메렌츠는 깨끗했고 논란의 여지없이 우리 누구나가 항상 되고자 했던, 가장 선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에메렌츠의 이런 면을 봐주는 ‘나’였기에 ‘나’는 에메렌츠의 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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