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주로 따뜻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항상 아쉬워하는 입장인데, 그럼에도 12월 연말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흥이 난다. 오히려 1월 신년의 희망차고 기운 넘치는 에너지가 빠지고 난 후의 2월을 매우 싫어한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될 봄인데, 나는 아직 무언가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 무기력해지곤 한다.
따뜻한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아무래도 사람들을 만나러 나서게 된다. 전기장판 안에서 두꺼운 극세사 이불을 덮고 있을 때 느끼는 따스함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성에 차지 않으니까. 누워있는 순간 떠오르는 다정한 얼굴들을 찾아 약속을 잡고 굳이비 연말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추운 날씨를 이기고 겨우내 직접 마주하는 순간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만남은 어느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드디어 다 같이 모였다는 즐거움을 토로하고, 올 한 해도 이렇게 지났다는 사실에 대한 소회를 나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사실 딱히 거창하진 않고 술과 실내의 열기로 인해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오가는 장난과 농담 사이로 대충 전해진다. 연말에 걸맞게 작은 선물과 편지로 나눈 진심이 서로에게 전해지고 나면 이제는 비로소 본편이다.
테이블의 시간을 돌려 우리 모두가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 십 대 때 만난 친구들과는 유치한 행동으로 서로를 화나게 만들고, 대학생 때 만난 친구들과는 내일 없이 끝을 보고, 취준생 때 만난 친구들과는 꿈과 미래에 대해 나누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라떼의 고충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그 시절 우리가 함께 경험한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종의 추억팔이인데, 해변에서 함께 쌓았던 모래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그 시절 우리가 만들었던 모래성을 기억 속에서 복원하다 보면 각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나는 성 주변에 울타리가 있었다고 말하고, 한 명은 성 옆에 이글루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성을 파도가 덮쳐 떠밀려갔다고 말하고, 나머지 한 명은 옆에서 놀던 어린아이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말한다.
모래성에 대한 기억을 계속해서 꺼내다 보면 문득 그 모래성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확연해진다. 물론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고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만, 그때 우리가 만들었던 그 모습과 완전히 같은 모습은 아니라는 것도. 그럼에도 그렇게 잊혀가는 일로 남기기에는 너무도 아쉽다는 마음에 계속해서 모래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파할 시간이다.
덕담과 애정과 온기를 나누며 또 하나의 자리가 파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올 날이 더 많으니까 언젠가는 오늘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 오늘을 보다 꼼꼼히 기억하겠다며 다짐하며 술기운과 함께 추운 거리로 나온다. 아직 올해는 가지 않았고, 내년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날로 한 걸음 나아가 본다. 곧 새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