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인생 계획표가 있었다. 인생 계획표에는 뭔가 하면 나이대 별로 내가 이루고 싶은 나만의 소소한 업적(?)들을 적어둔 것이었다. 서른 살의 내가, 마흔 살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두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이십 대 중반까지는 틈만 나면 계획표에 목표를 적어두곤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쓴 모든 계획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너무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또 그때까지 나의 계획은 내가 원하는 그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그러한 행운의 절반은 아마도 나의 빈곤한 상상력이 실현가능할 만한 범주의 계획만을 짜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가고 있는 내 인생에 대한 계획표를 짜고 있다 보면 어느새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인생 계획표 작성을 그만두었던 것은 더 이상 나이대 별 목표를 세우지 않게 되었던 시점이었다. 평생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진다면, 흔들려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배신당해도 인류애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진다면 마흔 살에는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일흔 살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계획을 짜면서 미리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고 대비했다면, 더 이상 계획을 짜지 않을 때는 어떻게 예행연습을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요새는 내내 책을 본다. 그중에서도 소설을 주로 보는데 보다 보면 뭐 딱히 영웅적이고 대단한 사람들만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변화가 필요하고,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그런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시대도, 나라도, 다르지만 뭔가 변화의 조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와의 공통점이 적디 적어도 그냥 읽어본다. 읽다 보면 주인공은 갖은 풍파를 견디면서 맞이하는 결말은 희극이기도 하고 비극이기도 하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읽는 맛이 있다. 그러다 보면 주인공의 마음 어딘가 움트는 무언가가 있다. 책을 덮은 이후의 주인공의 삶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인물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고,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이어나갈 거라는 확신이 생기는 지점이.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나는 주인공과 함께 예행연습을 시작한다. 나의 인생에 대해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던 그때보다 매우 구체적이다. 주인공이 마주한 변화들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으니까 보다 몰입할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주인공의 마음에서 움튼 무언가가 내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한순간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