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5일 여름에 멈춰버린 빨간 전자레인지는 내 기억의 시작에서부터 함께했다. 거창에서 1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난 엄마가 창원의 4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난 아빠가 결혼하면서 냉장고, 세탁기와 함께 마련한 혼수품이었다.
"쟤 20년도 넘었지.."
부모님이 결혼한 지 2년 차에 나를 낳으셨으니 나보다 딱 두 살 많은 셈이다. 전자레인지로서 24년을 살았다면,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
그날 이후로 마음이 계속 싱숭생숭했다.
빨간 전자레인지는 분명 그날 낮에도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주었고, 내 치킨을 따뜻하게 데워줬다. 그게 마지막 작동이었다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전자레인지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웃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이 전자레인지는 오래 쓴 일기장이나 어린 시절 아기수첩 같은.. 그런 느낌의 물건이다.
나는 분명 전자레인지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다음날 자연스럽게 전자레인지 코드를 꽂고 치킨을 데우려고 했다. 불이 들어왔고 2-3초 만에 불이 꺼졌다. 그때 나는 진짜 전자레인지가 수명을 다했다는걸 확인했다. 그리고 한동안, 지금도 왠지 모를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오래 쓴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옛날부터 비슷한 것이었다. 오래 사용한 물건에는 영혼이 깃들어서 도깨비가 된다는 식의 민간 설화는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다.(아 지금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새로운 차를 사고 오래 탄 차를 폐차하지 않는 경우는 흔하지 않나.
우리 집은 중고차를 어린 시절에 한번 조금자라고 한번 사서 둘 다 폐차했었다. 첫 폐차는 내 눈으로 목격했고, 두 번째는 못 봤지만 이것도 마음 아픈 일이다. 재산세다 뭐다 하는 어른들의 이유에 소중한 우리 붕붕이라는 감성 어린 말은 수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여전히 슬픈 기억이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내 개인 물건에도 애착이 큰 편인데, 어릴 때는 흔히들 좋아하는 동물 인형을 동생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작은 인형들은 휴지를 한 칸씩 뜯어서 이불을 덮어줬었다. 엄마가 나 몰래 쓰레기봉투에 우겨담은걸 발견했을 때는 내 마음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들은 중고등학교 교복과 책이다. 교복을 입던시절에도 매일 입는 교복이 소중했다. 어느 정도였나면 넥타이랑 단추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기도 했었다.(미친 사람 아닙니다. 귀여운 중학생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 이름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책은 만화책부터 소설책까지 깔끔하게 보존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책 한 권 한 권을 비닐로 포장하고 매일 먼지를 털었다. 다른 사람이 만지면 성난 고양이처럼 화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과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건 하나하나에 가지는 애착이 줄기는 했지만, 5년 쓴 일기장이나 장롱 속의 교복, 그때부터 모으고 있는 책들은 평생 가져갈 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전자레인지는 이름도 지어준 적 없고, 의식해본 적 없을 정도로 늘 그 자리에서 정말 실질적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줬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고장 난 적도 없었고, 늘 만족스러운 따뜻한 음식을 편리하게 제공해줬다.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가전제품은 전자레인지가 아닐까? 집에 혼자 있던 그 어린날들의 식사는 빨간 전자레인지 친구가 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눈물 난다.)
어제 일과를 끝내고 집에 가보니 빨간 전자레인지가 있던 자리에 낯설게 매끈한 검은색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전자레인지가 없으면 요리는 조금 불편해지지만 내심 새 전자레인지를 들이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는 너무 당황해서 엄마한테 기존 전자레인지의 행방을 물었다.
엄마는 베란다에 있다고 했고, 바닥에 널브러진 전자레인지가 마음이 아팠다.
오늘 든 생각은 이 전자레인지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녀석이랑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찍어줄 사진사분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꼭 찍고 싶다. 나를 위해서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