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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Feb 14. 2017

건너다, 걷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다. 온종일 문장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책장을 넘기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문득 문장들이 몸속에서 피어났다. 이팝꽃처럼, 흰쌀밥처럼 후둑후둑, 흐드러졌다가는 다시 또 무성하게 피어오르곤 했다. 어떤 날은 문장이 불러오는 모든 기억들을 통틀어 ‘너’라고 환치했다. 바람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문장들은, 기억들은, ‘너’는 그대로 풍장(風葬)되곤 했다. 그래도 얼마나 가뿐한 죽음인가, 바람 속에서 가벼이 흩어질 수 있다는 것은.  


오랜만에 책장을 넘겼을 때, 혹은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SNS에서 예고 없이 박혀오는 문장이 있다. 한순간 심장으로 박혀와 움직이지 않는 문장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비록 남루하고 오래되었으나 결코 바래지 않는 기억의 들숨과 날숨을 내쉬곤 했다. 활자와 활자 사이, 행간과 행간 사이, 수없는 기억들은, 잠시 멈췄다가 내게로 온다. 문장들 사이의 긴 사막들을 건너서 온다. 기억은 예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드는 순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들이 어느 순간 날것 그대로 맞부딪혀오는 생생한 삶의 기억들을 그대로 마주 대해야 한다는 것을.


흰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세워진 마음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신처를 잃은 내 사랑도 보일까, 온종일을 떠돌던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빠르게 흘러서, 또 어떤 날은 너무 느리게 흘러서, 창문도 문도 없던, 출구를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온종일 울었던 날이 있었다.


날것의 기억들이란 내게는 온통 그런 것들이었다. 아프거나, 잃어버렸거나, 놓아버린, 어린 날의 기쁨들. 그런 날은 한껏 부풀어 오르는 통증을 안고 거리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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