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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Feb 27. 2017

지난 여름을 추억하다


그때는 8월이었고, 깊은 밤, 드러난 살갗에 닿는 바람은 시원했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들은 수런수런,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숨어들었고, 사람들은 짙푸른 여름 잎새처럼 자주 웃음을 터트렸다. 낮에 소나기가 내렸다고 했다. 서늘하고도 강렬한 물줄기가 이 고도 구석구석에 내려 꽂혔다고 했다. 그때 나는 책장을 넘기며 간혹 펜을 들고 노트 모서리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기도 하며, 이따금은 공상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서야 하루 종일 갇혀 있던 숙소에서 빠져나와 내비를 켜고 무작정 이곳으로 왔다. 어두운 밤공기 아래 산책로는 조금 젖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평상시보다 더 통통- 거리며 걸었다. 걸음에도 음표가 있다면, 우리들의 걸음은 경쾌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한낮의 소나기가 가져다준 유쾌함을 목에 걸고, 두근거림 속을 걸었다.


간간이 낯선 언어들이 들려왔다. 내가 발 내딛고 있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영토일 것이라는 자각이 들자, 낯선 경계선을 넘어왔을 그들이 지녔을 여행에의 설렘이 전이되어 왔다. 이토록 가벼운 것이다- 설렘이라는 것, 여행이라는 것, 그리고 일상에서 잠시 비껴서있다는 것은. 이토록 두근거리는 매혹들을 숨기고 있는 여름밤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쉬이 전이된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그리고 다시 너에게로.



그때, 우리를 둘러싼 공기 역시 가벼이 톡톡- 꽃봉오리처럼 터졌고, 여기저기서 카메라의 플래시들도 폭죽처럼 터졌다. 또 누군가는 카메라 렌즈를 가까이하고 고궁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를 사각 프레임 안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둠과 밝음, 고요와 왁자함이 공존하는 곳. 강한 조명 속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하던 단청들. 안압지의 야경은 빛났고, 호수는 천년의 시간을 그대로 되비춰주었고, 새로이 단장된 고궁은 물결 속에서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람들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오래된 소나무들이 보였다가는 정자가 보이곤 했다. 석축들을 비추는 불빛들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소란스러움도 그 검은 물빛 속에서 한 순간 사라지곤 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 다시 8월의 언저리가 되면 그녀는 이날을, 달콤한 한여름밤의 꿈을 기억할 것이다. 가벼운 맥주는 열대야처럼 나른했고, 기분 좋은 들뜸을 선사했으며, 그렇게 그해 여름은 마음이 맞는 일행들과 함께 떠들썩했다. 그리고 여름은 기꺼이 우리들의 기억 속으로 박제되어 갔다. 경주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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