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푸른 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영 Feb 20. 2017

바람 속을 거닐다


# 바람


바람이었다, 종일을 바람이 불고 불어, 온 세상의 새벽과 저녁과 아침이 맞닿은 기억들로 가득 찬 그곳을 우리는 ‘바람의 언덕’이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저만치 가볍고 투명하고 서러운 빛들을 기다랗게 걸어놓은 것이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내밀하고 어두운 기억과 가는 머리카락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여름밤들을 또한 주렁주렁 몸에 매다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바람마다, 우리의 존재를 무겁게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지구의 자전을 놓아버리는 일이었다. 놓아버린, 놓쳐버린, 놓아야만 했던, 목소리들에게, 차마 할 수 없었던 안녕을 고하는 일이었다.



 # 햇살


푸른 언덕 사이, 맑은 소리를 내던 아이의 뜀박질은 사랑스러웠다. 작고 어린 손에 들린 바람개비에도 햇살이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솟대 위에도 햇살은 맺혀있었다. 이정표 위에도, 난간 위에도, 커다란 조각상 위에도, 끊어진 경의선 위에도 어디에서든 햇살은 있었다. 어깨를 따라, 활짝 펼쳐진 웃음을 따라, 연의 꼬리에도, 하얀 천 사이로 흘러내리던 그것은, 세상 어디에든 있었다. 환하게 빛났고 저물녘이면 세상의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맑고 가벼운 것일수록 투명하게 부서져 내렸다. 때때로 부서져 내린 것들이 자그락자그락 거리며 내는 울음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 언덕


그것은 둥글고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언덕을 따라 펼쳐진 길 역시 천천히 휘어져 있었다. 내 일생에도 이렇듯 둥글고 커다란 능선을 가지고 싶었다. 기쁜 날이거나 서글픈 날, 그 어느 때라도, 촉급한 걸음이 아닌 한없이 느린 걸음이어도, 누구에게서도 비난받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는 곡선 하나쯤 나도 지니고 싶었다. 나의 하루는 언제나 절박했고, 자주 아파야 했다. 허락되지 않는 것들일수록 멀리 있었다, 연약한 하루들은 그렇게 가파르고 길기만 했다.


언덕 위에는 기다란 길이 놓여 있었다. 당신과 함께 나란히 걷고 싶었다. 가늘고 긴 철대 위 매여진 하얀 천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휘날렸다. 바람은 늘 불었고, 노을에 붉게 물들곤 했던 깃발들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아무도 없는 깊은 밤에도, 깃발들은 깃대에 매여 끊임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리본들 역시 누군가의 소망의 무게만큼 흔들렸을 것이다. 소망이 깊을수록, 까맣게 속을 물들이며 흔들렸을 것이다.



# 다시 창공


그러나 이곳 파주에서의 가장 큰 주인공은 바로 저 창공이 아닐까. 누군가 얼레를 감았다가는 길게 풀어 한 줌의 기쁨과 어린 희망들을 날린다. 그 사이로 즐거운 웃음들이 통통- 튀다가 수련 위에 앉았다가 초록의 잔디 사이로 동그랗게 굴러간다. 초록과 빨강, 노랑, 하양, 보라, 이렇게 색색의 이름표를 가슴에 걸고 들뜬 가슴으로 돌아가는 바람개비들의 무덤들을 지나, 잠시 카페에 앉았다가 다시 걸었다. 카페의 이름은 <카페, 안녕>이었다. 카페로 가기 위해서는 호수 위 다리를 가로질러야 했다. 그 짧은 풍경이 좋았다. 붉은 건물을 뒤로하고 둥글고 긴 길을 따라 깊은 계절 속을 걷는다. 길 위에 선 순간, 이미, 시선이 닿는, 발길이 닿는, 모든 것은 여행이다. 바람들이 길게 누워있는 길을 지나 발목으로 내려앉은 그리움을 본다. 푸른 풀물이 복숭아뼈 사이로 스며들어 온다. 그리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등허리에 매단 자기만의 파란 하늘을 연처럼 날아 올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기억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